오노른 감정 합작
사랑
[사쿠사토] 사람의 감정은 덧없다.
W. 룸
'사람의 감정은 덧없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사쿠라이 쇼는 어렸을 적부터 모든 세상이 잿빛으로만 보였다. 볼 수 있는 색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흰색, 회색, 검은색. 온통 무채색의 것들 뿐이다.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메마른 감정인 사람마냥 살아왔던 것 같다. 그 어린 아이가 사랑 한 번 느껴보지 못하고 대학생이 되었건만. 여전히 똑같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 감정을 쉽게 내보이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는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연습을 쉴 틈 없이 했다. 사실은, 그렇게 친절한 인간은 아닌데. 덕분에 주위사람들에서의 평판은 사쿠라이 쇼는 친절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사쿠라이는 바람에 흩날리는 앞쪽 머리카락들을 손가락으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서 1년이 지난 봄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대학교에는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의 열기가, 다 죽어가는 졸업반 선배들의 기운을 이기다 못해 넘쳐났다. 2학년이 되고나서 1학기의 첫 날 부터 열정적이다. 벌써부터 동아리 홍보라니. 학교에서 소식을 알리는 제일 큰 게시판에는 다른 동아리의 홍보 전단지를 붙일 틈이 없어보였다. 다양한 동아리들의 홍보지로 빼곡했다. 개중에는 여러 군데에 두 세개씩 붙인 전단지도 눈에 띄었다. 대학생이 되고나서 주위의 또래 아이들은 사랑에 열광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제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건지 적어도 그의 눈에는 사랑에 목매는 것처럼 보였었던 것 같다. 웃고, 울고. 감정적인 인간들이 대다수였다. 앞에서 나눠주는 동아리 홍보 전단지를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아, 미안. 사쿠라이군. 이 프린트 좀 미술관 2층 끝쪽 교실에 놓고 와줄래?"
친절하다는 평판의 말로다. 사쿠라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상냥한 입꼬리로 긍정의 메세지만 전달한다. 그렇게 친절하다는 평판을 하나 더 얻는다. 마치 배달 앱에서 별점을 더 얻고자 이런저런 서비스들을 하는 것처럼. 지긋지긋하다. 가끔은 이러한 일들이, 제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져서 너무 갑갑하다고 느껴졌다. 친절은 하지만, 주위에 친구라고 느껴지는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사쿠라이는 이곳에서도, 외톨이였다.
왜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냐고 물어본다면, 사쿠라이는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생활했는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다. 그게, 저에게 더 이득이 되는 일이라서? 그렇다기에는 베푼 것은 많으나 받은게 없다. 그런 이유를 대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학생이 다 빠져나간 조금 늦은 오후의 학교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제 막 미술관에 들어선 사쿠라이 쇼의 신발과 지면이 마찰하면서 발생하는 소리만이 조금 울리듯이 들렸다. 첫 날이라 다들 교수님들이 오리엔테이션만 진행하신 것 같은데.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자 활짝 열어둔 창문이 눈에 띄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오늘 입은 셔츠를 휩쓸고 지나갔다. 봄이지만 오후가 되니까 좀 춥구나. 2층과 나무의 크기가 비슷한지, 떨어진 벚꽃잎이 복도에 나뒹구는 게 눈에 띄었다. 누군가 있나보네. 근거를 확실히 하듯, 어쩐지 복도의 불도 켜져있었다. 누굴까 싶어 교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창문으로 엿봤다.
사쿠라이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빛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게 난생 처음 본 색의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색채였다. 한 사람이 무릎을 굽히면서까지 바닥에서 열심히 종이에 색칠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미 볼에는 붉은 빛과 푸른 빛의 물감들이 교차하여 칠해져 있었다. 작업하다가 실수로 묻혀진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에는 그 사람 뒤의 위쪽에 있던 창문에서 떨어져 내린건지 연한 분홍빛의 벚꽃잎 하나가 머리카락에 걸려 있었다. 사쿠라이는 어쩐지 이 곳으로 들어가는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심장 고동소리가 스스로도 느껴짐을 손으로 가라앉히면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탁! 아무래도 힘조절에 실패했는지, 문이 벽에 부딪힌 모양이다. 소리에 반응한 그 사람의 시선도 저를 향했다.
"누구...?"
"저, 교수님이 프린트를 이곳에 두라 하셔서..."
저를 쳐다보는 것도 잠시였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당황했을 법한데도, 당황하기는 커녕 다시하던 일을 진행할 뿐이다. 긴장하고 있던 사쿠라이의 목젖에서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붓과 캔버스가 닿는 소리가 사쿠라이의 귓속을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사쿠라이는 손에 있던 프린트물을 맨 앞쪽의 단상 위의 책상에 천천히 올려놓는 순간에도 눈길은 계속 한 곳에만 쏠려 있었다. 좀 더, 이곳에 있고 싶다. 평소와 다르게 느릿하게 움직이던 사쿠라이는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 내일도, 와도 될까요...?"
열심히 용기를 내서 물어봤는데, 쉽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침이 바짝 마르는 순간이다. 금세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손가락으로 뜯었다. 이 순간, 사쿠라이는 괜히 물어본건가 싶어 지금 당장이라도 벽에 머리를 쿵쿵 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순간에도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물감 칠을 하고 있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살결의 손이 보였다. 만지고 싶다. 닿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색칠을 그려가던 손이, 잠깐 멈칫하는 기색이 보였다.
" ...그래. "
다시 한 번 저를 쳐다본다. 미세하게 눈꼬리가 사르륵 접혔다. 사쿠라이의 두 볼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정처없는 심장 소리가 사쿠라이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이 쿵쿵거렸다. 볼에서부터 얼굴전체가 달아오른 사쿠라이는 아, 그, 그... 뭐라 말을 할 것 처럼 얼버무리다가 "안녕히계세요!" 라고 외치고서는 서둘러 교실에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고 다리에 힘이 풀린 사쿠라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달아오른 두 볼이 뜨거웠다. 이런게 사랑에 빠진다는 감각이구나 싶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오죽하면 사쿠라이의 손이 절절 저렸다.
두 손으로 가렸던 손들을 얼굴에서 떨쳐내자, 방금 전까지만해도 모든 것이 다 컬러풀하게 보이던 세상이 금세 어둡게만 보였다. ...하지만, 이 사람 곁이라면. 다시 창문을 통해 흘깃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이 사람만 보면 주변 풍경의 색깔들이 다채로워 보였다. 그동안 몰랐던 교실의 풍경도, 저 너머의 벚꽃나무의 색과 지는 석양의 색까지도, 이제서야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선명하게 보이는 색의 주인은 내가 완전히 갔다고 생각하는건지 손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쿠라이는 한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사쿠라이의 인생에 있어서 아직 아무런 것도 수식이 되지 않은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석양이 다 져서 그런지 하늘이 깜깜했다. 매서운 바람에 벚꽃잎들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그 사람의 미소를 생각하니 사쿠라이도 슬쩍 웃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부로 사쿠라이 쇼는 덧없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