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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

[사사나루]

W. 운시

안녕하세요.

 

오늘 펜을 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문득 당신이 떠올라서입니다. 뜬금없는 편지에 누가 받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대충 빨간 봉투에 담아서 보내면 당신은 알아주겠지요? 새빨간 봉투. 당신과 꼭 닮은 새빨간 색을 가지고 의미 모를 타로 카드만 덜렁 들어있는 깔끔하고 멀쩡해 보이면서,

 

아주 잔뜩 망가진 속을 지닌 깨끗한 봉지.

 

 

오늘 바에는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봐요. 다들 추워서 따듯한 집으로 돌아가기 바쁜가 봅니다. 하지만, 그런 날씨에도 꼭 따듯하게 무장하고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전혀 따듯하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술의 약하게 취해서 가볍게 오른 체온으로 미소를 지으며 나갔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떠올랐어요.

 

당신이 찾아왔던 날도 이런 겨울바람이 차고, 눈이 내리던 날이었죠. 소복하게 쌓인 어깨의 눈을 털면서 당신은 가볍게 웃었죠. 코트도 없이 날씨에 맞지 않게 정장만 깔끔하게 입고서는.

 

[ 죄송합니다, 늦은 시간에. 잠시 몸만 데우고 나가도 괜찮을까요? ]

 

저 기억력 좋지 않은가요? 한 단어도 안 까먹고 기억해요. …사실 적어놨어요. 이상한가요? 당신의 목소리가 흐려지길래, 냅다 기억나는 말을 모두 옮겨 적었던 날이 있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았던 날이었죠. 그래서, 지금 그 종이를 옆에 두고 있어요. 간간이 당신이 기억나지 않아지더라고요. 애처롭게도.

 

그게, 너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웃기죠? 하하.

 

 

안 웃긴 거 알아요. 죄송해요.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자면- 저는 괜한 오지랖으로 당신에게 술을 한잔 건네주었죠. 밖이 추우니까 낮지 않은 도수로 체온이라도 높이고 가라는 의미였어요. 당신은 그 붉은 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이제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모른다고 해둘게요.

 

죄송해요. 조금 눈에 먼지가 들어갔는지 글씨가 조금 번져버렸네요. 새로 꺼내서 적긴 추잡하니까 계속 적을게요. ( 아니지, 그냥 계속 쓰는 게 더 추잡하려나요? )

 

 

또 무슨 일이 있었죠? 흐릿해진 기억을 꼭 붙잡고 싶은데, 사람의 기억이란 게 꼭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더라고요. 이제 당신의 목소리 하나, 당신의 웃음 하나, 미소, 손짓, 무엇도 선명하지 않아요. 당신이 오던 날은 다음날의 그 다음날의 다음날까지 선명하게 기억이 났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까만 정장에 반짝이던 변호사 뱃지는 기억해요. 새하얀 피부는 기억해요. 붉은 입술도 기억해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해 낼게요. 저만큼은 당신을 온전히 기억해야 하니깐.

 

 

그랬으니까. 지금 이걸 적고 있겠죠.

 

 

 

간지러운 바람이 부는 봄에도, 찌는듯한 더위의 여름 속에도, 떨어지는 낙엽 향의 가을 속에도, 첫 만남의 겨울에서도, 당신은 너무도 똑같았는데. 변함없었는데. 잔뜩 안개가 끼어버린 기분이네요. 당신은 어떤 얼굴이었죠? 절 바라볼 때 어떻게 바라보았죠?

 

미미한 미소와 상냥한 웃음과 함께 가볍게 터진 웃음소리와 입가를 가리던 깔끔한 손가락은 기억하는데- 당신이 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저도 모르겠는데요. 그니깐- 그건 당신의 겉모습이잖아요. 당신의 아주 상냥한 겉모습이 거짓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어요. 설마 몰랐겠어요? 저 이렇게 보여도 바텐더라고요. 술에 일가견 있다면서 간단한 걸 틀리는 진상이라던가, 무작정 와서 독한 술이나 달라는 사람이나 별별 사람들 다 만나는 직업이에요. 알죠?

 

꽃이 예쁘면 뭐 하겠어요, 뿌리가 썩었는데. 꽃향기가 향기로우면 뭐 하겠어요, 피우지도 못하고 져버릴 텐데. 예쁘고 아름다운 당신. 꽃 같은 당신. 백합 같은 당신.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같은 당신. 꽃잎이 피지도 못하고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면 당신이 떠올라요.

 

언제인가? 당신이 떠올라 버려서 꽃병을 막 던져버렸던 날이 있었네요. 혼자 있는 방이라서 다행이었어요. 다행히 다치진 않았어요. 유독 당신은 제가 다치는 것만 걱정했죠. 손을 다치는 걸 참 걱정했어요.

 

 

아 맞아요, 맞아. 그러고 보니 손 다치는 걸 걱정했죠? 그날은 분명히 기억해요. 선선한 가을이었어요. 당신이 유독 더 지치기 시작하던 나날에. 빗자루질을 하다 당신을 반겼고, 인사하다가 나무 손잡이에 긁혀서 피가 나니, 당신은 드물게도, 진실되게 걱정해주었죠.

 

팔자로 늘어진 눈썹으로 손수건을 꺼내서 하얀 손수건이 붉게 물드는 걸 신경도 쓰지 않고 손에 묶어주었죠.

 

[ 손이 중요하신 분인데, 손이 다치면 안 되죠. ]

 

은은히 웃던 입가를 기억해요. 언제나와 같이 마냥 다정하면서도 그렇지만은 않은 씁쓸하고 안타까운 웃음. 그게 당신의 진실된 마음이었다는 걸 알아요. 그때도 알았어요. 그치만, 그때는 처음 그러한 감정을 마주했던지라 부정했죠. 착각한 것일 거라. 그럴 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 무엇이 있더라?

 

무엇이 있을까요? 전 당신을 기억해야 하니까, 좀 더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일상을 완벽히 기억해야 하는데. 바보 같은 저는 제 감정밖에 기억하지 못해요. 당신이 피곤한 날에는 일부로 가볍고 잠이 잘 오는 차를 섞어서 드렸죠. 속이 안 좋아 보이는 날에는 죄송하지만, 논 알코올을 알코올이라고 속이고 드렸죠. (이건 사실 알았겠죠? 당신은 술은 꽤 잘 마셨으니까.) 그래요, 제가 드린 모든 술은 당신이 담겼어요.

 

그래서 전 신기해요. 어떻게 당신을 처음 만난 날에 드린 술이 그렇게 붉게 물드는 술이었을까요?

 

 

정말, 바보 같죠?

 

 

…….

 

… 죄송해요. 편지지에 눈물이 많이 떨어져 버렸네요. 겨울이라 건조한데 왜 이리 제 눈만 눈이 비가 되어 떨어질까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미리 죄송하다고 말해둘게요. 이제부터, 본론이에요. 서론이 길었죠? 그래도 노력했다고 해줘요. 평화롭고 평화로웠던 기억만 떠올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당신을 떠올리면 붉게 물들어 피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백합이 떠올라 버리는데 어쩌겠어요.

 

 

이건, 다.

 

… 당신 탓이에요. 나루세상. 아니, 제 마음대로 료라고 막 부를거예요. 어차피 당신은 못 받을 텐데, 내가, 내가 신경 써야 해요?

 

 

료, 왜 그랬어요? 그랬어야만 했어요?

 

 

당신의 휴대폰에 그 적은 번호 중에서 하나인 저에게 당신의 부고가 전해져왔을 때, 제가 어떤 감정이었을 것 같아요? 그리움? 슬픔? 사랑? 아니요, 그런 멋있는 게 아니에요.

 

전-

 

당신을 원망합니다. 계속, 영원토록 원망할 거예요.

 

 

제가 당신을 기억하는 한 원망할 거예요. 저한테, 제가 사랑할 기회라도 주지 말았어야죠. 차라리 만나기도 전에 첫 만남 이후에 제가 당신을 그릴지라도, 제가 다시 와달라고 말할지라도, 그래도, 오지 말았어야죠. 왜 모든 사람에게 칼같이 대했으면서, 천사인 척 굴었으면서 저에겐 그리도 가혹했나요.

 

 

바보 같은 사람. 너무한 사람. 원망스러운 사람.

 

이렇게 버려두고 잠만 자고 있으면 어떡해요? 깨지도 못할 잠을 편하게도 자시면, 저보고, 어떻게 하나요.

 

 

난 아직도 당신을 못 잊는데. 당신의 마지막 말만을 못 잊어서, 흐려져가는 기억 속에서도 당신의 마지막 말만 선명해서. 천사의 변호사? 아니에요. 당신은- 악마에요. 검게 물든 날개를 그림자 속에 숨기고 천사라고 거짓말했어요.

 

차라리 당신을 잊으라고 해주지. 잊을 수 있게 해주지. 마지막에 왜,

 

 

제가 특별한 듯이 단축번호로 저장까지 해줬어요?

 

왜, 왜… 제게 문자를 남겨주었어요? 마지막 문장이 왜, ‘미안합니다’ 였어요? 제게 미안할 걸 알았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죠. 그러지 말았어야죠!

 

 

… 죄송해요. 너무 울어서 글자가 제대로 보일지 모르겠네요. 조금 찢어진 부분이 있어도 용서해주세요. 용서받고 싶었어요.

 

 

이렇게 당신을 원망하고, 당신을 미워하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용서해달라고 하고 싶었어요. 제가, 감히 씁쓸히 웃던 당신에게 고백을 했었던 사실을, 그 과거를 원망함과 동시에 사과합니다.

 

 

당신이 절 사랑하였던, 하지 않았던, 그 질문에 당신이 지었던 웃음의 의미를 피로 얼룩진 당신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거든요.

 

당신이 미안해한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죠.

 

 

그래도, 그래서 저는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생각해봐요, 당신을 기억하기 위한 방식이 사랑인 건 너무하잖아요. 이런 외사랑이 어디 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제가 못 견뎌요. 못 견디다가 당신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겠어요. 차라리 만나지 말걸, 하고 생각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전 원망할게요.

 

하필이면 그날 나타났던 당신을 눈에서 놓치지 못한 저를, 당신의 걱정에 수줍게 달아오르던 저를, 눈물도 웃음도 무엇하나 당신에게 온전히 전해주지 못한 저를, 후회합니다.

 

세상은 깨끗하지만은 않아서 저는 맑게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원망합니다.

 

당신을 향한 마음을 잔에 담아, 미련으로 차갑게 식히고, 사랑을 한 모금 슬픔을 한 모금 걱정을 두 모금씩 섞어서 이러 저리 섞인 술이 검고, 탁해져서 씁쓸한 맛만 남기지만, 누구보다 인상적으로 남도록.

 

이 술의 이름을 원망이라고 지어두겠습니다.

 

원망스러운 제 사람. 언제 다시 와주시려나요. 당신을 위한 술을 준비해두고 있을게요. 언젠가처럼 달이 휘영청 밝은 날. 아직도 당신의 환영을 보는 한.

 

언제까지라도.

 

 

 

추신. 답장이 온다면 그 안에는 꼭 고백에 대한 답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결국 대답해 주지 않으셨잖아요. 저는 당신을 잠꾸러기 라고 저장해두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미련, 따위의 이름으로 저장해둔 것에 대한 복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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