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솨솨
※ 이 글에는 유혈, 살해, 시체훼손, 폭행, 욕설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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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말이 없다.]
「좌우가 다른 분장을 한 화려한 피에로의 차례가 오면 수많은 사람들은 환호를 하고, 피에로의 쇼가 시작되면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아름다운 무대가 펼쳐진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에로는 신비로웠다.」
Chapter 1. [Piero lacht.]
마을의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서커스단은 매년마다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서커스단의 공연은 그 어떤 서커스보다 대단했고, 특히 그 곳의 피에로는 다른 서커스단의 피에로들보다 쇼의 규모가 컸고 사람이 할 수 없는 범위의 쇼를 했기에 신기하고 아름다운 피에로의 소문을 들어보지 않은 이방인들도 한 번 보면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서커스의 단장은 그런 피에로를 이용해 자신의 인지도와 부를 끊임없이 축적해나갔다. 그런 단장의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피에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릴 때 버림받은 자신을 거두고 키워준 단장에게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속에 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모두 숨겼다. 그의 말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기에 더더욱 참아갈 뿐인 피에로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즐겁게 떠드는 곡예단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자 오래된 습관이 되었다.
“피에로 형아는 나중에 서커스단에서 나가게 된다면 뭘 할 거야?”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왜? 형아는 단원들 중에서 인기가 제일 많잖아!”
“그것도 잠깐이야. 내가 서커스를 그만두면 인기도 점차 식어버릴걸?”
“그런가....?”
무대에 오르기 전의 초라한 대기실에선 항상 어린 아이들의 대화소리와 피에로의작은 웃음소리로 가득 차있다. 매일 마다 곡예단의 어린 아이들은 노란머리의 체구가 작은 피에로에게 항상 다른 질문을 했고 피에로는 항상 같은 답변을 하는 게 피에로에겐 하루의 소소한 재미였다. 피에로는 곡예단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었지만 아이들을 도울 수도 같이 도망칠 수도 없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만 내쉬며 긴장도 풀 겸 아이들의 앞에서 작은 마술을 보여주곤 했다. 사탕이나 초콜릿, 서커스단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간식이기에 단장 몰래 자신과 아이들의 입 안에 하나씩 넣었다. 달콤함이 몸을 녹여버리는 기분에 잠시나마 행복을 느낀 피에로는 그렇게 현실을 견뎌가며 공연을 해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곡예단원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마술을 보여주며 긴장을 풀고 있는 하루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단장의 손에 끌려오듯이 들어오는 한 남자아이. 피에로의 또래처럼 보이는 그 소년은 단장이 새로 데려온 곡예단원이였다. 여리한 몸에 하얀 피부, 예민함이 녹아있는 청순한 얼굴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장발이 피에로가 소년을 소녀로 착각하게끔 만들었다. 단장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곡예단원으로 일할 아이다. 니노미야와 동갑이고 실력은 차차 알게 될 거다.”
단장은 이 말을 끝으로 소년을 더러운 시선으로 한 번 훑어본 후 대기실을 나갔다. 그런 단장의 행동을 모른 척 하고 치워둔 시선을 소년에게 고정한 피에로는 소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서커스단의 곡예단은 주로 몸집이 작은 아이들을 데려와 단원으로 사용했고, 그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단장은 귀족에게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사창가에 저렴하게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피에로의 눈에 보이는 소년은 저번 달에 단장이 귀족에게 팔아버린 아이를 대체할 단원치곤 몸집이 컸다. 이 사실들을 모르는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들은 오늘부터 자신들과 함께 할 소년에게 달려가 질문을 마구 퍼부었다. 어디서 왔는지 부터 시작해서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걸 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런데 그 소년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며 우물쭈물 거렸다. 눈치가 빠른 피에로는 그 소년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고 굳어있던 표정을 순식간에 부드럽게 바꾸며 소년이 빠져나올 수 있게 길을 텄다.
“자, 너네 이제 연습하러 가야지.”
“에~ 싫어! 아직 대답을 못 들었단 말이야!”
“너네 전부 다 연습 안한다고 단장한테 이른다.”
피에로가 단장에게 이른다는 말과 함께 단장을 흉내 내는 모습을 본 곡예단은 까르르 웃으며 따로 마련되어있는 연습공간으로 도망가듯이 달려갔다. 웃음과 대화소리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리고 이 곳에 남아있는 사람은 피에로와 그 소년 뿐 이였다. 웃으며 아이들이 나간 곳을 지켜보다가 다시 의자에 앉은 피에로는 웃고 있던 얼굴을 다시 숨기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너, 말 못하지.”
소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피에로는 소년의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서커스단에서 함께 지내야하기에 불편한 감정을 고이 접어 마음 한켠에 두었다. 피에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의기소침하게 서있는 소년에게 고개를 들라고 했다. 고개를 들며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정리한 소년은 꼼지락거리던 손으로 피에로에게 대화를 걸었다.
‘제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내가 여기서 몇 십 년을 살았는데 그것도 눈치 못 채겠냐.”
‘그렇겠네요.... 그럼 수화는 어떻게..?’
“내가 어릴 때 날 도망치게 도와줬었던 사람한테 배웠어. 나가면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가르쳐 줬는데 이젠 필요 없거든.”
피에로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은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있던 의자를 조용히 빼서 앉았다. 소년의 행동에 피에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자신과 동갑내기인 사람과 처음 대화 하는 게 신기하고 낯설었다. 소년을 훑어보던 피에로는 그의 손이 자신의 손보다 크고 곱게 생긴 것이 이 곳에 오게 된 계기가 가족에게 팔려왔음을 대충 짐작해냈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렇게 손이 곱고 손톱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을 리가 없었기에 피에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였지만 시선을 느낀 소년은 손바닥을 보이며 피에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소년이 할 수 있는 인사의 표시였다. 하지만 피에로는 손이 내밀어졌다는걸 알았지만 모른 척 소년의 손을 잡지 않았고,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소년에게 이름을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혹시 종이와 쓸 것이 있나요?’
“없어. 그리고 나 까막눈이라 글자 못 봐.”
‘아.... 제 이름은 오노 사토시 라고 해요.’
오노 사토시.
피에로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입 밖으로 한 번, 소년의 이름을 두 번 말했다. 소년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준 피에로는 자신의 검지를 입술에 얹었다. 쉿,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영원히 잊으라는 암묵적인 뜻 이였다. 소년은 잠시 피에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곰곰 히 생각을 하던 피에로는 갑자기 소년의 손목을 잡고 왼손을 자신의 앞으로 펼쳤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맞대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레 손을 떼어내니 그 사이에서 사탕이 쏟아져 나왔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사탕들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소년은 놀람과 신기함이 섞인 표정으로 피에로를 쳐다보았고 그런 소년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으로 환영 선물이라며 단장에게 보이지 않게 숨기고 아이들과 함께 나눠먹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소년은 웃으며 입모양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아이들이랑 조용히 나눠먹어. 그리고 너, 감정을 숨기는 게 좋을 거야.”
곱게 자라온 도련님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피에로의 예상과 다르게 소년은 의외로 금방 곡예단에 적응을 했다. 소년의 곡예실력은 그 어떤 곡예단원보다 훌륭했고 자기보다 몸집이 작은 아이들처럼 유연하고 날렵하게 몸을 썼다. 아이들은 그런 소년에게 곡예를 배워갔고 실력이 더 좋아진 곡예단원들은 소년덕분에 처음으로 피에로와 함께 서커스의 마지막 무대를 채웠다. 무대를 끝까지 지켜 본 단장은 소년을 칭찬하며 다음에도 더 열심히 하라는 말만 했다. 피에로는 그런 단장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모습이 멍청해 보였던 건지, 아니면 그저 그런 소년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은 건지를 잠시 헷갈린 피에로는 화려한 분장을 지우고 밖으로 나갔다.
모든 무대가 끝나면 피에로는 단장의 부름을 받고 그를 따라 좁은 방으로 들어갔다. 서커스단에서 쫒겨 나지 않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힘이 없는 피에로는 그저 춤을 추고 묘기를 부리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인간으로써의 삶이 무엇인지 까먹은 피에로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무대에서 내려온 순간부터 화려한 분장과 웃음을 지움과 동시에 감정과 표정을 숨긴 채 해가 저물면 단장에게 불려가 더럽고 불결한 손길을 받아내고 새벽마다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보이지 않은 족쇄와 시선들이 매일 마다 피에로를 괴롭혔지만 그는 끝까지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진실 된 감정을 철저하게 숨기고, 가두고, 죽이고. 이것이 피에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일이였다.
그런 피에로에게 있어서 소년은 작은 구원과도 같았다. 피에로의 연습을 매일 마다 조용히 지켜보고 박수를 쳐주는 소년의 모습이 수많은 관객의 환호보다 행복했고, 피에로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감정이 간질간질하게 싹을 틔우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을 죽여야만 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새 하얀 옷을 입은 곡예단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곡예단의 묘기는 훌륭했지만 그 중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갈색 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년의 모습은 흡사 천사와도 같았다.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은 울고 있었다.」
Chapter 2. [ein weinender Junge]
소년은 한 귀족가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특출 난 외모에 말을 잘 하고, 영특한 아이였다. 소년의 부모는 그런 소년을 정말로 아꼈고 어렵게 태어난 아들 이였기에 금전적인 지원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다. 귀족가의 집안에서 모자람 없이 살아 온 소년은 부모의 바람대로 올곧고 바른 아이로 자라주었고, 모두가 동경하는 존재가 되었으나 소년은 그 시선들을 버거워했다. 그래도 부모의 바람을 거절할 순 없었기에 불편함을 감추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숨이 막혀오지만 모든 이들이 바라는 모습의 거짓된 웃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로 올곧은 아이로군요. 마음 같아선 우리 집의 아들로 데려오고 싶을 정도에요.”
“말씀만으로도 영광이네요. 하지만 저는 저의 부모님의 곁을 지키고 싶어요.”
“역시 마음도 착하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였네요. 정말로 당신은 내면도 아름다워요.”
사교파티에서 소년을 처음 본 귀족들은 소년의 품성과 외모에 반해 하나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들 중에선 소년을 자신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했던 귀족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정중히 거절하며 친한 사이로만 남자는 말을 돌려 말하곤 했다. 그런 소년의 행동에 아무도 비난을 하지 않았고 귀족들 중에서 가장 오만하고 이기적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귀족도 소년의 한 마디에 미소를 보이며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으니 그걸 지켜본 다른 귀족들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것보다 가장 신기하다고 느끼는 것은 뒤에서 소년을 모함하는 자는 아무도 없고, 소년을 살해하려는 마음을 품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이였다. 모두가 사랑해주고 모두가 동경하는 존재, 소년은 원치 않게 그런 존재가 되어있었다.
모든 것에 특출난 재능은 보인 소년이 그 재능들 사이에서 빛나는 걸 발견했을 때의 나이가 15살 이였다. 그 빛은 소년의 마음을 간지럽히며 호기심을 자극시켰고 빛에 이끌린 소년은 부모 몰래 마을의 변두리로 향했다. 사교파티에서 소문으로만 들어본 그 피에로를 만나보고 싶었다.
서커스의 막이 오르고 구석진 자리에 앉은 소년은 자신의 정체가 들키지 않게 얼굴을 가리며 공연을 감상했다. 하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곡예단과 코끼리를 데리고 쇼를 꾸미는 조련사, 거울을 보며 춤을 춘다는 느낌을 주는 쌍둥이곡예사. 그들의 공연은 소년의 마음에 있는 빛을 키우지 못했고 소년은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갑자기 커진 환호성은 소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동공이 커지게 만들기에 딱 이였다. 환호성이 모자랄 정도로 빛나는 무대.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 피에로가 나타났다. 화려한 의상에 노란 머리를 찰랑이며 양쪽 눈 밑에 별과 눈물을 그려 넣은 얼굴에 웃음을 보인 피에로가, 소년의 앞에 나타났다. 그 찰나의 순간에 소년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피에로에게 마음을 뺏기고 홀려버린 느낌을 받았다. 피에로의 공연에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혀버린 소년은 그 순간동안 자신의 진실 된 감정을 느꼈다. 아름다움, 신비로움, 황홀감, 화려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 난생 처음 겪어본 감정은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시켰고, 소년의 빛은 드디어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날 이후로 거짓되었던 소년의 삶에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평소와 같은 거짓된 행동, 말투, 감정이 계속되었지만 비밀이라는 꽃이 피어났고 소년은 그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달이 보이는 창문 앞에서 그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피에로의 행동을 따라했다. 처음엔 손동작과 팔의 움직임 이였고 이후엔 다리의 움직임, 세밀한 동작까지 따라하더니 나중엔 표정까지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자신이 마치 무대 위의 광대가 된 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싹틔워준 피에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환각까지 볼 정도로 피에로를 동경했고, 사랑했다. 소년은 그런 피에로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기 위해 피에로의 작은 행동들을 기억해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대인관계는 쉽게 무너진다고 했던가, 진실 된 감정을 찾아낸 소년은 부모를 위해 힘겹게 쌓아올린 모든 관계들과 감정들을 천천히, 그리고 치밀하게 무너트렸다. 그렇다고 소년은 미쳐버린 것이 아니였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을 위해서 했던 일이였다. 이것만이 나를 구원할 길,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조금씩 나타나는 나도 모르는 사실들을 위해서.
언제부터였을까, 소년은 빠짐없이 나갔던 사교파티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고 방 밖으로 절대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다. 그런 소년의 행동에 부모는 걱정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이 계속 방에서 나오지 않자 화가 난 부모는 강제로 방문을 부수고 소년의 방으로 들어가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언제나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던 책상은 잉크와 종이로 엉망이 되어있었고, 가지런히 걸려있던 옷들은 행거와 함께 바닥에 널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침대 위에서 이불을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충분히 충격적 이였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는 소년을 본 어머니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만 흘렸으며,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뒤에 있던 시녀들도 놀란 나머지 몇 명은 기절을 했다. 벙 찐 표정으로 서있던 아버지는 화를 내며 침대 위에서 춤을 추던 소년의 팔을 붙잡고 바닥으로 내던졌다.
“네가 한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아 너의 어미와 함께 수일을 걱정했다. 그런데 너는 방 안에서 그렇게 미친 것이냐!”
“제발.... 이건 다 꿈일 거 에요....”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소년의 행동에 아버지는 미쳤다는 말과 함께 소년의 뺨을 세게 내리쳤고, 어머니는 애지중지 키워온 아들이 미친 나머지 넋을 놓고 실언만 늘어놓는 모습을 힘겹게 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한 아버지는 놀란 표정으로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집사에게 소년을 마차에 태우고 기다리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소년은 그저 웃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았고, 감정도 다시 꺼내었다. 자신을 껴안고 하염없이 우는 여자에겐 관심도 없었다. 팔을 붙잡고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늙은 남자의 행동에도 소년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냥 피에로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싶을 뿐 이였다. 마차 안에 던져지듯이 들어간 소년은 마차를 손으로 더듬으며 피에로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거면 된다고 중얼거렸다. 같은 말을 수 백 번 입 밖으로 내뱉고 있을 때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탔다. 굉장히 화가 난 듯한 남자의 얼굴은 다른 이가 본다면 공포를 느끼겠지만 소년은 하나의 가면극이라고 생각하며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소년의 행동에 더 화가 난 남자는 소리를 지르며 작은 유리병을 내려놓고 마차에서 나감과 동시에 여자의 비명소리와 출발하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갑자기 출발한 마차는 심하게 덜컹거렸고 얌전히 놓여있던 희뿌연 액체가 담긴 유리병은 톡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실언을 하던 소년은 그 모든 게 거짓인 양 정신을 차리고 그 유리병을 주워서 뚜껑을 열어 입 안에 다 털어 넣었다. 이상한 맛이 나는 액체는 소년의 몸 안을 망가트리기 시작했고 소년은 고통에 휩싸인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마차 바닥에 쓰러졌다.
15살의 소년을 태운 마차는 마을의 구석지고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소년은 행복을 느꼈다.
이렇게 되서, 다시 피에로를 만날 수 있어.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환호하던 관객들도, 빛나던 극단의 불빛도 사라졌다. 신비로운 피에로와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은 어둠 속에 감춰졌다. 그렇게 거짓된 두 사람은 사라지고, 진실 된 감정을 가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Last Chapter. [Der Verstorbene hat kein Wort.]
인격, 노란머리 소년에겐 인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자신이 누구인지도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축축하고 어두운 사창가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격따윈 버려야만 했다. 부모가 누구인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 그저 낡은 메트리스에 누워 남자들에게 몸을 팔고 접대를 하며 술과 마약에 찌든 삶을 사는 것이 소년의 축복이였다. 몸이 점점 망가져가는게 느껴졌지만 그게 큰 일인가, 소년의 몸을 갉아먹는 병을 고쳐줄 의사는 이 곳에 존재하지 않았고 뼛속까지 전해지는 고통은 수많은 술과 마약으로 지워냈다. 14살의 소년는 그 누가봐도 섹스에 찌들어있는 마약쟁이 남창이였다. 자신의 방 문 앞에 서서 줄담배를 피워대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 하나를 골라 데리고 들어가서 자신의 뒤를 대주고 돈을 받으면 끝이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조금 달랐다.
비가 억세같이 쏟아지는 날은 장사가 되지 않아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이 규칙이였지만 그 날따라 소년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밖으로 나와 비를 맞으며 젖어가는 담배를 다른 한 손으로 담배가 더 젖지 않게 가려가며 겨우 피우고 있었다. 속으로 화를 내며 담배를 피워대던 소년 앞에 우산을 들고 있는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허름한 흰 티 하나만 입은 채로 비를 맞고 있는 소년과 깔끔한 정장을 입고 우산으로 비를 피하고 있는 남자는 한 눈에 봐도 확연하게 비교가 되었다. 흠뻑 젖어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살짝 올린 소년은 자신보다 키가 좀 더 큰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야, 오늘 장사 안하는데.”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 소년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좁은 골목으로 데려갔다.
“나는 당신을 만나러 온겁니다.”
“나를?”
“예.”
남자의 대답에 소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남자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마치 자신이 소년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 처럼.
“당신을 키워보고 싶어요. 나는 가족이 없거든요.”
“왜 나인건데?”
“당신이라서요. 니노미야 카즈나리 군.”
자신의 이름을 익숙하다는 듯이 부르며 검은 가죽장갑을 벗고 손을 내미는 그의 행동은 소년을 더 놀라게 만들었다. 한참을 경계하던 소년은 남자의 손을 살짝 잡았고, 남자는 웃으며 소년의 손을 잡은 채로 흔들었다.
“고마워요. 이틀 안으로 다시 올게요.”
악수를 한 후 손을 놓고 다시 장갑을 낀 남자는 이틀 안으로 온다는 말만을 남기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벙 찐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남자가 간 흔적을 눈으로 훑어보던 소년은 멎어가는 비를 피해 방 안으로 들어가 성냥을 타고 내려가는 불을 입에 물고 있던 줄담배의 끝에 비볐다.
시간개념이 없는 소년은 남자가 말한 ‘이틀’ 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시계를 읽을 수도, 본 적도 없는 소년이 이틀이라는 단위를 알 리가 없었고 그저 해가 뜨면 아침이요, 해가 저물면 밤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 남자가 한 말은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속이 텅 빈 말이라고 확신한 소년은 자신의 기억에서 남자를 지워버리고 수확 없는 공허한 삶을 다시 보내며 혼미해지다 못해 흐릿해진 정신을 마약으로 갈갈이 찢어버렸다.
그래도 남자는 정확히 이틀 뒤에 소년을 찾아왔다. 모두가 잠드는 해가 뜨기 시작하는 밝은 새벽에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소년의 방으로 찾아와 약에 취한 소년을 깨우고 소년이 다시는 약에 손을 대지 못하게 2주 동안 아무도 몰래 새벽마다 곁을 지키며 약에 의존하던 소년을 잠시라도 진정되게 했다. 그 이후론 남자는 소년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보여주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알려주고 갔다.
“이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글로 역사를 기록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두기도 하죠.”
첫 날은 책과 깃펜을 보여주었고 그 다음 날 부터는 글을 가르쳤다. 남자는 소년의 이름과 이곳에서 빠져나오면 쓸 수 있는 간단한 단어 등을 가르쳤고, 소년은 남자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남자는 소년에게 손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오로지 손으로만 대화를 하는 것이 흔치 않았던 세상에서 손의 대화는 소년의 호기심을 최대로 끌어올렸고 글보다 더욱 빨리 학습하여 사흘 뒤에는 자기소개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가 있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흐뭇한 미소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일은 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일단은 최대한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갑작스러운 남자의 통보에 소년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하얀 깃펜을 소년의 손에 쥐어주고 방을 나섰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한 달 남짓 동안 찾아오지 않았고 소년은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잊어버렸던 암울함과 외로움은 한꺼번에 찾아와 소년을 괴롭혔고, 모든 걸 다시 잊기 위해 소년은 다시 약과 술에 찌들어가기 시작했다. 손톱이 까맣게 물들어갔다.
해가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새벽의 빛이 살짝 열린 방문의 틈새로 보이는 정신을 잃고 낡은 매트리스에 쓰러진 듯이 누워있는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아침안개가 서서히 나타나는 시간, 모두가 잠들어있거나 쓰러져있는 시간에 소년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텅 빈 사창가의 골목을 채웠다.
“내가 많이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첫 날과 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작게 속삭이며 소년을 살짝 흔들었다. 아직 약에 취해 있는 소년은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문손잡이를 잡고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고 자신을 데리러 온 천사라고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였다. 상체를 벽에 기댄 채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을 허공에 휘적이는 소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안쓰러워 보였고 남자는 그런 소년의 팔과 허리를 붙잡고 쉬- 소리를 내며 누가 깰라 소년을 데리고 조용히 방을 나와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요.”
또각,
“저의 이름은”
또각,
“나루세 료 입니다.”
“이게 내가 겪은 이야기야.”
‘그 뒤에는? 어떻게 됐어?’
“그 남자는 나한테 이름을 알려주고 총에 맞아 죽었지. 물론 총을 쏜 사람도 죽었어.”
어두컴컴한 무대 위에 앉아있는 소년은 자신의 옆에 서있는 피에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피에로의 모습은 그 어떤 무대보다 빛나 보였다. 무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끝낸 피에로는 소년의 옆에 앉아 사탕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 이야기는 좀 지루하지?”
소년은 피에로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사탕을 입 안에 넣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박하 향은 소년의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달그락 거리며 사탕을 먹는 소년을 지켜보던 피에로는 자신의 손에 남아있는 검은 사탕을 입 안에 넣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냈다.
“우웩-! 미친! 감초사탕이잖아!”
화가 난 채로 혓바닥을 내밀고 헛구역질을 하는 피에로의 모습을 본 소년은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신의 옆에서 웃는 소년을 본 피에로는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웃지 말라는 말을 하다가 혀가 얼얼해지자 노란색의 알사탕을 입에 넣자 그제서야 진정되었는지 좀 전보다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그런 피에로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그 날 이후로 소년은 극단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아픈 줄 알고 곡예단의 숙소로 찾아갔지만 아이들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모른다고 말하며 피에로를 내보냈다. 이상했다. 소년은 서커스단에서 피에로와 함께 잘나가는 구경거리인데 그런 소년이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 엄지를 뜯던 피에로는 머릿속이 새 하얘진 느낌이 들었고, 곧장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은 피에로의 예상대로였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뛰어간 단장의 집안은 엉망 이였다. 여기저기 박살나있는 목재 가구들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유리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루가 되어 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힐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는 소년은 한 눈에 봐도 온 몸에 상처를 달고 있었고 단장은 기분 좋은 얼굴로 그런 소년을 미친 듯이 밟아대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겐 체벌이 필요한 법이다. 당장 나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피에로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년을 폭행하던 단장의 움직임이 멈췄다. 날카로운 단검이 단장의 목을 향해 날아와 박혔고 피에로는 목을 부여잡은 단장을 향해 걸어갔다. 신발조차 신지 않은 발은 유리조각으로 인해 피범벅이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단장의 앞에 선 피에로는 목에 박혀있던 단검을 한 번에 빼내자 손으로 막고 있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입과 목에서 피를 흘리며 죽은 단장의 시체를 한 번 훑어본 피에로는 발로 잘근잘근 밟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몸을 떨며 누워있던 소년은 피에로의 모습을 보고 눈이 커졌다. 피에로의 등 뒤에는 알 수 없는 검은 아이가 히죽히죽 웃으며 피에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언가를 속삭이고 다시 웃는 그 아이는 소름 돋을 정도로 끔찍했으며 외관은 피에로와 완전히 똑같았다. 미친 듯이 떨리는 몸을 뒤로 물리며 피에로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피에로가 소년의 발을 붙잡고 침대로 끌고 갔다.
그 때, 피에로의 귓가에 들려오는 자신과 똑같은 아이의 말에 피에로는 무너졌다.
「저 애도 죽이자. 너를 사랑하지 않은 아이잖아. 저 아이는 널 사랑하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몰랐어? 쟤 말할 줄 알아. 저거 연기하는거야. 그러니까 죽이자. 너에게 거짓말을 했어. 다른 아이들도 죽이는 거야. 어때?」
“판단은 내가 해. 조금만 기다려.”
「괜찮아. 이 모든 건 꿈이라서 다음날이면 모든 게 다 원래대로 돌아와.」
멘탈이 부서진 피에로는 이미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단장을 찔렀던 단검보다 조금 더 긴 칼을 꺼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피에로의 모습에 소년은 겁에 질린 얼굴을 했으나, 금방 희열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린 피에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소년은 일부러 피에로를 자극하고 있었다. 피에로에게 죽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소년의 모습은 마치 변태 같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죄인의 모습이 아닌 고통을 즐기는 사람 이였다.
피에로는 그런 소년에게 칼을 들이밀고 위협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는 분노를 지워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피에로의 뒤에 있던 분노는 그런 피에로를 보고 답답해 하다가 피에로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그림자로서의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멍청한 새끼. 몸만 팔던 새끼가 무슨 사랑을 한다고 그래? 저 새끼 안보여? 너한테 뒈질려고 여기 들어 온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새끼.」
“...뭐?”
「비켜. 이젠 내 차례니까.」
그림자가 사라지더니 피에로의 머리색이 검게 물들어갔다. 밝았던 머리색은 찾아볼 수 없어졌고 초점이 없던 눈은 살기를 띄었다.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소년의 웃고 있던 안색이 어두워졌고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졌다.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떠오른 한 마디. 도망쳐야 한다.
“어디가? 너 나한테 죽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 불러냈으면서 왜 도망가?”
빠른 걸음으로 쫒아오는 그림자의 모습은 흡사 악마와도 같았다. 인간의 영혼을 갈구하는 악마는 소년의 육체를 찢어버리고 영혼을 잡아먹기 위해 쫒아오는 존재였다. 아무리 도망쳐도 숨을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점점 숨이 차올랐고 그림자와의 거리가 가까워 질 때 즈음, 근처에 있던 검은 숲을 발견했고 소년은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갔다.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있는 숲은 한 번 길을 잃으면 빠져나올 수 없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그림자를 따돌려야만 했다. 한참을 도망치다가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돌리던 그 때,
“여기 있네?”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살의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는 그림자의 모습은 소년을 겁에 질리다 못해 움직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몸을 덜덜 떠는 소년의 꼴이 우스운 그림자는 나무에서 내려와 소년의 눈앞에 칼을 갖다 댔다.
“이제 술래잡기는 끝이야. 날 불러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 멍청한 새끼를 차지할 수 있었어.”
“너는... 도대체 뭐야...?”
소년의 질문에 그림자는 활짝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상기된 목소리로 답을 해주었다.
“나는 니노미야 카즈나리의 숨겨진 인격체이자 분노를 모아둔 존재야. 만나서 반가워. 물론 이게 마지막 인사가 되겠지만 말이야.”
폐허가 된 마을은 저주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 저주는 아무도 모른다. 저주에게 죽은 자들은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저주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