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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치피

for eternity

  O는 대체로 숨김이 없다.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지만 숨기는데 재주도 없고 흥미도 없어서 옆에 있다 보면 금방 눈치채기 일쑤였다. 눈치 없기로 유명한 A마저 O의 의중은 금방금방 눈치챘다. 사실 입을 다무는 이유도 대개 보면 말 길게 하기 귀찮은 탓이 컸다. 그만큼 꾸미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서 주변 사람 중에 그가 사람이나 짐승 피 빨아먹고 사는 흡혈인 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자기소개에 놀라 자빠지는 건 딱 하루면 끝났고 이틀만 지나도 사람들은 서서히 적응했다. 그냥 O라서. 늘 무던하고 한결같고 꾸밈없는 사람이라서. 혼란에 휩쓸리지 않고 고요한 사람이라서. 그래도 여태 별문제 없이 산 건 애초에 유지하는 인간관계가 좁은 반경을 가진 덕이 컸다. O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여럿 그어놓고 각각의 선마다 한계점을 부여했다. 여기까지는 가끔씩 만나도 괜찮을 사람.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친구라 불러도 좋을 사람. 또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죽지 않는 자신이 상대방 임종까지는 함께하고 싶은 사람. 가장 바깥의 선마저도 들어오지 못할 인간은 애초에 아는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N은 겉으로 보여주는 2%로 남은 98%를 감추는 사람이었다. 딱 2%만 보는 사람들은 그를 O 같은 유형으로 생각하지만 딱 일주일만 알고 지내면 평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람들과 있으면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주제에 말수 한참 적은 O보다도 드러난 정보가 적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복잡한 거 질색하는 O가 친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놈이라 평했다. 그러나 조금 아는 사람은 그래도 O의 정신세계와 제법 잘 맞는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 읽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O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알아듣는 사람이라 되려 옆에 둘만 하지 않겠냐고 변론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을 가장 잘 아는 S와 A, 그리고 M은 N을 두고 O가 그은 여러 개의 선 중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사람이라 정의내렸다. 감히 누가 가타부타 말 얹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한 관계. 한 문장으로 분석할 수 없는 관계.

  N과 O의 사이가 단편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다름 아닌 O의 식사 시간이었다. 흡혈인은 당연히 피를 마신다. 평범한 쌀밥 퍼먹는다고 몸에서 거부반응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첫째로는 혀에서 맛을 못 느꼈고 둘째로는 배고픔이 해갈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 혹은 짐승의 혈액만이 깊은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19세기면 모를까 21세기를 사는 흡혈인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산 채로 목덜미 물어뜯는 짓 따위 꿈도 못 꿨다. 깡촌에도 CCTV가 설치되는 마당에 사람은커녕 들짐승조차도 들킬세라 빨아본 적이 없다. 애초에 타고난 성격부터 제 손으로 인간들 사냥해서 목덜미에 송곳니 꽂아 넣는 행위는 절대 못 했다. 그러니 유일한 식사수단은 어디선가 공수해오는 혈액팩에 빨대 꽂아 들이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피는 피잖아. 누구 보여주기는 좀 그렇지. O의 오랜 철학 중 하나, 남들에게 피 빠는 모습 보여주지 않기. O의 가장 막역한 친구들도 밥 먹을 때가 되면 다 쫓겨났다. 그는 오로지 홀로 고립된 공간에서만 식사를 했다. 낳고 기른 양친도 그 순간은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 N은 O의 집 냉장고에서 혈액팩 꺼내 뜯고 빨대 꽂아 건네준 뒤 쭉쭉 들이키는 O 옆자리에 앉아 쫑알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람 피랑 짐승 피랑 맛이 달라? 엄청. A형이랑 B형이랑도 달라? 조금. 이런 대화도 세상천지 N만 가능했다.

  이유는 단 하나. N의 생존 역시 수혈에 달렸기 때문에.

 

§

 

  O는 비 오는 아침이면 꼭 20년 전 어느 날의 꿈을 꿨다. 우중충한 새벽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던 소리. 비에 쫄딱 젖어 다 죽어가던 소년. 드러난 목과 팔뚝에 잔뜩 뒤덮인 송곳니 자국. 핏기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그리고 부러 깔깔거리며 사라지던 미상의 목소리.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다. 몇몇 무리 지어 사는 흡혈인들 중에 반쯤 정신 훼까닥 돌아서 어린 인간 잡아다가 살아있는 먹이로 쓰는 놈들이 있다고. 그런 놈들은 흡혈인 대신 흡혈귀라 부르는데 성질이 고약하기 짝이 없어서 그 인간이 죽기 직전까지 가면 시체 치우기 귀찮으니까 혼자 사는 흡혈인 집 앞에 버리고 간다고. 운 나쁘게 걸린 흡혈인은 진동하는 피 냄새를 참지 못해 대부분 인간의 목덜미를 물고 결국 숨 끊긴 시체 치우게 된다고. N은 그 어린 인간 중 하나였고 O는 혼자 사는 흡혈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O는 타고나길 식욕이 적다. 풍기는 냄새가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눈이 돌아갈 만큼 먹고 싶지도 않았다. 시체 치우는 건 더더욱 귀찮았다. 결국 다 죽어가던 N을 거두었다. 그때 N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고 O는, 세다가 까먹어서 기억도 안 난다고 했지.

  재수 없게 흡혈귀 굴에 잡혀 들어갔던 어린 애는 더욱 재수없게도 가장 질 나쁜 놈한테 걸렸다고 했다. 피만 빨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 흡혈귀는 호기심에 돌았기로 유명하던 놈이라 N은 강제로 인간 피와 흡혈귀 피가 섞인 주사를 맞았다. 원래는 피를 빨린 인간이 다시 흡혈인의 피를 빨아야 저도 흡혈인으로 변하는 게 정석이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변하는지가 궁금해서 어쩌고저쩌고. 결과적으로 N은 변신하지 않고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러나 O의 집에서 눈을 뜬 뒤로 알게 된 사실. 인간의 몸이지만 주기적 수혈 필요. 아주 소량이나마 몸에 흡혈인의 피가 돌고 있는 탓이었다. 알게된 계기는 퍽 우스웠다. O가 먹다 식탁에 올려둔 잔을 피인 줄 모르고 한입 마셨다가 열흘 내내 간호해도 좀처럼 낫지 않던 몸의 상처며 빠진 기력이 회복된 것이다. N은 낫자마자 집으로 돌아갔고 양친은 꼬박 1년 만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며 동네잔치까지 벌였다. 그리고 그는 딱 한 달 만에 길에서 쓰러졌다. 정신 차리자마자 찾은 곳은 당연지사 O의 집이었다. 그때부터 O는 N의 생명수단이 되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일면식도 없던 어린 애를 왜 받아들였냐 물었더니 그냥 한평생 살아있는 생명들 피만 얻어먹고 살았는데 제 손으로 사람을 살린 건 처음이라 기념으로 거뒀다고 답했다. 그래봤자 별 건 없고 한 달에 한 번씩 제가 먹는 혈액팩을 딱 한 모금 입에 넣어준 게 다지만 어쨌든 N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N은 커갈수록 O의 삶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O의 오른팔이 되어 주변의 잔가지 죄다 쳐내고 다녔다. 정체를 숨기지 않는 그와 달리 철저한 계산 하에 말을 꺼냈다. 당신 덕분에 목숨 부지했으니까 내가 다른 건 딱히 모르겠고 사는 거 좀 더 편하게는 만들어줄게요. N의 일방적인 계약이었다. O는 그저 내버려 뒀을 따름이다. 나이답지 않게 빠른 눈치와 두뇌회전이 생각보다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둘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많은 것을 공유했다. O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사념을 나눴고 N은 모든 일상을 O에게 바쳤다. 공유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품는 감정까지 형태를 달리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무사히 스무 살이 된 N은 생각했다. 언젠가 이사람의 삶에 완전히 뛰어들어야지. 그래서 둘이 함께 문자 그대로 영원을 누려야지. 그러기 위한 때를 노려야지.

  N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겉으로 보여주는 2%로 남은 98%를 감추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O에게는 98%를 보여준 뒤 2%의 진심을 감추었다. 어느새 서른이 된 N은 O와 같은 인생을 걷기 위해 꼬박 10년간 적기를 기다렸다. O가 모르는 유일한 것이었다.

 

§

 

  N이 픽픽 쓰러지는 빈도가 늘었다. 완전한 성인이 된 신체는 여전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몸 구석구석 배회하는 흡혈인의 피를 철저히 배척했다. 가끔씩 받아먹던 혈액은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일반 사람이 걸리는 병이 아니니 병명조차 없고 당연히 병원마저 소용없는 일이라서 오늘 숨이 멎지 않으면 다행인 날들이 이어졌다. 병을 끝내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인간의 삶을 포기하는 것. 그래도 O는 끝내 그 말을 뱉지 않았다. 젊은 날에 아쉽게 죽는 것과 괴물로 다시 태어나 영원히 사는 것. 둘을 비교하자면 단연 전자가 낫다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으로 죽는 게 호상이지. N은 그 생각을 전면으로 비웃고 싶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게 개죽음이지 무슨 호상이야. 어차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도 완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생을 살았다. 한 입 먹고 만다고 안 먹은 게 되나. 나는 지금도 출처 모를 피 빨며 사는 사람인데. N은 지금이 딱 O를 설득할 시기라고 직감했다.

  "오노 씨."

  "안 돼."

  "나 오늘만 세 번 쓰러졌어요. 알고 있지?" 

  "알아. 그래도 다시 생각해."

  "나 죽으면 당신이 제일 아쉬울 텐데."

  "아니라고는 안 해. 솔직히 너 없는 삶이 별로 상상은 안 돼. 남들 죽을 때처럼 하루 슬퍼하고 말 수도 없어. 근데 그래도……. 괴물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는 게 낫잖아."

  O는 자신도 인정하기 싫어 일평생 숨겼던 속내를 처음으로 꺼냈다. 인간으로서의 죽음. 절대 가질 수 없으니 이젠 욕심내지 않지만 한때나마 처절히 갈망했던 것. 본인의 지난날을 결코 잊지 않은 만큼 N에게서 마지막 권리를 뺏고 싶지는 않았다. 이는 N조차도 짐작하지 못한 이면이었다. 근데 그건 당신의 생각이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내 생각마저 당신과 똑같이 닮을 수는 없잖아요. O가 마지막 카드를 내놨으니 이제는 제 차례였다. N은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말을 꺼내 들었다.

  "있잖아, 사토시. 이건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인데 말이야. …나는 오래 살고 싶어."

  당신이랑.

  세상에 요절이 꿈인 사람이 어디 있나. 고대시절부터 무병장수는 온 인류의 염원이다. 그러나 N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파급력이 달랐다. O의 입매가 달싹거렸다. N은 이미 승기를 잡은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O가 말했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어. 이거 진짜 모험이야. N이 대답했다. 나 어차피 지금도 시한부 환자야. O는 수많은 단어로 설득했고 N은 그의 염려를 철저히 거절했다. 너 평생 해도 못 봐. 나 원래 야행성이라 해 뜰 때 자는 거 알면서. 차별도 은근 많이 받아. 와 정말 신경도 안 쓰는 부분이다. 너 여태 먹던 밥 다 포기하고 혈액팩에 빨대 꽂고 살 수 있어? 모든 생명체는 본능에 맞춰 살게 되는 법이에요. N은 O가 말하는 모든 애로사항을 현재 내려다보고 있는 제 손톱 거스러미보다도 사소한 불편함으로 치부했다. 말하는 O만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N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발 뺄 이유가 없어요. 우리 딱 천 년만 같이 살다가 조금 지겹다 싶으면 아무 바다나 가. 고통이 생존보다 덜 끔찍하겠다 싶을 때 손잡고 나란히 앉아서 해 뜨는 거 봐. 재가 되기 전까지 같이 있어. 그전까지는 나 절대 당신 삶에서 발 안 빼. 그러나 N은 늘 그렇듯이 하고 싶은 말 위에 장난을 덧씌워 전했다.

  “했던 말 그만하고 빨리빨리 진행합시다.”

  “하……. 맨날 게임만 하니까 모험 중독이 되는 거야.”

  N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태도로 목을 쭉 빼고 O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이던 O는 결국 N의 목에 두 송곳니를 깊게 박아넣었다. N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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