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
래쉬
잘 나가는 변호사와 유능한 의사의 연애는 순탄할 수 있을까? 나루세 료와 토카이 세이시로의 연애 소식을 듣는 사람이면 한번쯤 드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은, 그 당사자들조차도 할 수 없었다. 현재, 연애의 당사자인 그들은 이게 제대로 된 연애인지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
차트를 팔락팔락 넘기는 토카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반경은 종이 위만이 아니라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인, 그러나 제 쪽을 향하게 화면을 돌려놓은 휴대폰까지였다. 잠잠한 휴대폰을 흘끗, 빽빽한 글이 쓰인 차트를 빤히, 테이블 위를 흘끗, 다시 복잡한 그래프가 그려진 차트를 빤히.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차트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애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던가? 그 누구에게도 대답해주지 못할 질문을 삼켰다. 펴질 줄을 모르는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팼다. 몸을 뒤로 빼자 등에는 싸구려 소파의 푹신함을 가진 등받이가 닿았다. 제 연인이 보고 싶었다. 당장에 일을 팽개치고 달려가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팽개치기에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다물었던 입을 열자 가벼운 욕이 새어나왔다. 젠장. 다시 입을 열자 욕 대신 한숨이 새어나왔다. 길고도 낮은, 무거운 한숨이었다. 그 뒤에는 짜증이 밀려왔다. 너는 어쩌자고 유능해서,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바빠서. 연인임에도 3주간 얼굴 한번, 목소리 한번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지만 누구라도 탓 하고 싶었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탓할 사람이 없으니 빌어먹을 이 유능함을 탓해야지. 다시금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천장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제 연인을 그려 보았다. 신경 쓴 듯 가볍게 넘긴 머리, 반듯한 이마, 단정한 눈썹, 처연한 눈매, 오뚝한 코,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 입술, 갸름한 턱. 이렇게 연인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놓고 있으니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정말이지. 네가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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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넘기는 소리, 펜을 움직이는 소리, 간간이 뱉어지는 한숨소리, 펜의 끄트머리로 책상을 툭툭 치는 소리. 나루세 료의 집무실에서는 별의 별 소리가 섞여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 놀란 나루세가 떨어뜨릴 뻔 했던 펜을 꾹 쥐었다. 네. 간결한 대답에 문이 열렸고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사무장이 김이 펄펄 나는 찻잔을 쟁반 위에 받쳐 들고 얼굴을 내밀었다. 서류들로 어지러운 책상을 흘끗 본 사무장이 머뭇거렸다. 찻잔을 내려 둘 곳이 없어 난처한 기색이었다. 손을 들어 급하게 한쪽 구석의 서류를 치워내자 그 위로 찻잔이 달각대며 놓였다. 몸도 안 좋으신데,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이 섞인 말투에 나루세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았는걸요. 현재 나루세 료가 맡은 일은 꽤나 복잡하고 거물들이 얽혀있는 일이었다. 수차례 거절했던 안건이었으나, 결국 맡게 된 이유는 나루세가 차후 진행할 일에 관련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모르는 사무장과 사무원은 대기업의 압력으로 억지로 떠맡게 된 일에 변호사님이 너무나도 고생하고 계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벼운 감기까지 겹치게 되어 그들의 걱정은 하늘을 찔렀다. 좀 쉬라고 언질을 해도 나루세는 일이 많아서 안돼요. 라는 말로 거절했다. 그 결과 목에 가볍게 묶은 손수건과 이마에 붙인 해열 시트를 빤히 보던 사무장이 찻잔의 손잡이를 나루세 쪽으로 돌려주었다. 따뜻한 차라도 좀 마시라는 뜻이었다. 나루세는 말없이 싱긋 웃었다. 찻잔을 드는 것을 본 사무장이 그제야 등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닫히는 문을 보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나루세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오한이 들다가, 열이 확 올랐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아래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었다. 아프고, 피곤하고, 힘들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제 연인이었다. 물론, 평소에는 안보고 싶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항상 보고 싶은 사람이지만, 아프고, 피곤하고, 힘들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는 유난히 더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마주한 때가 언제였더라. 목소리를 들어본 것은? 하다못해 그 흔한 메시지 하나 나눠본 것은 언제였지. 물음은 가득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아쉬움과 서운함, 그리움이 한데 뭉쳐 나루세의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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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건드리자 환하게 켜진 대기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시계만이 토카이를 반겼다. 쯧, 가볍게 혀를 찬 토카이가 잠시 망설였다. 메시지를 보내볼까. 전화를 걸어볼까. 만나러 가도 되냐 물어볼까. 조금 어두워진 화면을 톡 건드려 다시 밝게 한 토카이가 말없이 손가락을 툭툭 움직였다. 밤 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너무나도 늦은 시간, 보통 사람이라면 잠에 들 시간이었다. 물론 방금 막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 보통 사람의 범주였다.
“…당연히 자려나.”
툭 뱉은 말은 저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쉬움이 짙게 배인 목소리는 느릿하게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말로 내뱉고 나니 그리움은 배가 되었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자판을 몇 번 쳐서 문장을 만들다가 다시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이내, 가장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을 쳤다. 그 문장은 지금 나루세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전송 버튼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이 가볍게 톡, 화면을 치자 메시지는 전송되었다. 화면에는 간결한 문장, 그 왼편의 늦은 시간, 그 위의 노란색의 1이 쓰여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 몸을 옆으로 기울이자 소파에 그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네가 빨리 보기를, 네가 빨리 답장 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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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기운으로 약을 복용하고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든 것이 어젯밤 11시였고, 눈을 뜨니 오전 11시였다. 이상했다. 가벼운 감기이고, 약도 먹었는데 몸이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물을 잔뜩 먹은 솜이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기분이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어 천천히 일으켰다. 상체만 일으켰을 뿐이었음에도 눈앞이 핑 돌았다. 눈을 꾹 감고 가만히 숨을 내쉬다가 다시금 일어섰다. 수십 통의 전화가 와있을 휴대폰을 찾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보이는 부재중 전화의 알림과 메시지 하나에 사무실에서 온 연락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렸다. 전화목록의 가장 위에 찍힌 사무장의 번호를 누른 나루세는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병원, 갑니다.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 해주세요. 잔뜩 가라앉고 갈라진 목소리에 사무장은 아무런 질책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알겠다며, 진료 후 전화 달란 말만을 남겼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신경 쓰였다. 그러나 그것을 읽기에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병원에 가는 것도 힘든데, 메시지 정도는 나중에 읽어도 되지 않을까. 무거운 머리를 굴리며 스스로 합의점을 찾았다. 우선, 병원에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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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틈이나 휴대폰을 들여다 본 것은 늦은 점심이었다. 휴대폰을 들고 복도를 걷는 토카이의 옆에서 세라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요즘 휴대폰 자주 보시네요?”
“….”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그…,”
세라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궁금은 했지만 대놓고 묻지 못할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말을 꺼낸 것은 최근 토카이의 상태가 퍽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달싹였다. 이내 눈을 꾹 감고 물었다.
“변호사님과…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세라의 말에 토카이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에 세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 그, 요즘 선생님 표정이 안 좋으시길래요…. 토카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세라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휴대폰을 부서져라 쥔 토카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없게 하러 가야지.”
“…네?”
“그러니까 신경 끄고 일이나 해.”
냉랭한 눈빛으로 세라를 쏘아본 토카이가 걸음을 재촉했다.
*
분명, 동네 병원에 갈 생각이었다. 우연인지, 신의 악질적인 장난인지. 동네 병원은 전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 곳은 휴진, 한 곳은 폐업, 한 곳은 아카데미 참석을 위한 휴업. 울컥 욕이 치밀 것 같았다. 몸이 힘들면 생각도 험해진다는 말을 몸소 겪고 있었다. 결국, 나루세가 향한 곳은 제 연인이 일하는 병원이었다. 이런 가벼운 감기로 가기엔 어울리지 않는 큰 병원이지만, 생각나는 곳이 그곳뿐이었다. 겨우 도착한 병원의 로비에서 하나부사를 만난 것은 과연 여길 오는 게 맞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열이 올라 사리분별이 힘들었다. 제 앞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달뜬 숨을 내뱉자 하나부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디 아프냐 물었다. 나루세는 잠시 머뭇대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접수도 하지 못했기에 하나부사를 통해 곧바로 의사를 만나는 것은 제 뒤에, 그리고 앞서 접수한 환자들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하나부사는 그런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 일렀다. 하나부사가 안내한 곳은 수면실이었다. 곧 토카이 선생님이 오실 테니까, 우선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하나부사는 말을 남기곤 수면실 문을 닫았다. 나루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 가득히 차오르는 제 연인의 향에 눈앞이 얼른거렸다. 연인인 그가 누웠을 소파에 다가가 몸을 던지듯 앉았다. 고개를 뒤로 꺾어 천장을 보았다. 먼지만 조금 묻은 천장을 보며 멍한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그러다 이내 포기했다. 열기에 절여진 머리는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눈을 감았다.
*
세라를 제쳐두고 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곳은 제가 가장 익숙한 수면실이었다.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가자 항상 제가 상주하던 자리에 앉아있는 뒤통수가 보였다. 들어올 땐 가벼운 숨을 몰아 쉴 정도로 급하게 들어왔으면서 소파에 앉은 사람을 확인하곤 수면실 문을 닫았다. 소파를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불편하게 소파에 기대어 있는 그 작은 머리통을 살며시 건드렸다. 머리카락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어라. 손이 천천히 머리카락을 지나 이마에 닿자 느껴지는 정상체온보다 높은 열기에 미간을 좁혔다.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슬며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료.”
걱정이 섞인 목소리가 낮았다. 가만히 부른 이름에 나루세는 토카이를 쳐다보았다. 열에 들떠 충혈 된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서둘러 나루세를 소파에 편히 누이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열이 오른 얼굴과, 가벼운 기침을 내뱉는 입술을 보며 토카이는 나루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를 토카이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삼키어내고 간병해주어야 했다.
가벼운 감기였으나, 생각보다 열이 빨리 내리지 않아 토카이는 마음을 졸였다. 불안한 듯 테이블을 손톱으로 툭툭 쳤고, 몇 번이고 열을 쟀다. 그리고 겨우 열이 내리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약기운에 잠이 든 나루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아파서 잠이 든 얼굴이 아니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웠다. 그럼에도 마주 볼 수 있어 좋았다. 정말이지, 좋기는 했으나.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또 호출이 울렸다.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겨우 삼켜내었다. 얼굴에 짜증을 한가득 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다지 길게 잔 것은 아니었으나 깊은 잠에 빠졌던 나루세가 눈을 떴다. 익숙한 수면실의 소파였고, 제 몸에 덮어진 담요 또한 익숙한 것이었다.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던 그가 팔뚝에 꽂힌 링거 바늘이 불편해 가볍게 인상을 썼다. 일으키려던 몸을 그대로 두었다. 천장을 보다가 눈을 굴려 절반도 못되게 남은 링거 파우치를 보았다. 또옥, 또옥. 느리게 떨어지는 수액을 보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가늠해보았다. 3, 4시간 쯤 지났으려나. 한결 가벼워진 몸이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주 잠시나마 연인의 얼굴을, 목소리를 보고 들었던 것이었다. 눈을 떴을 때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바짝 마른 입을 열었다 닫았다. 아, 혹시 환각이었나. 환청이었을까. 너무 보고 싶어서 착각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 유약해진 몸을 따라 마음도 불안해져갔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에서라도 그리운 당신을 보아야지. 입을 꾹 다물었다. 덮쳐오는 슬픔으로 숨이 거칠어졌다. 느릿하게 숨을 가다듬을 쯤, 수면실 문이 열렸다.
수면실에 들어온 토카이는 곧바로 나루세의 상태를 살폈다. 손을 뻗어 이마를 매만졌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앙 다물린 입술이 바르르 떠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토카이가 이마를 짚은 손을 떼어내고 나루세를 불렀다.
“…료?”
토카이의 부름에 나루세는 눈을 떴다. 그리운 연인이 저를 보고 있었다. 나루세의 앞으로 자리를 옮긴 토카이는 테이블에 대충 걸터앉았다. 부딪히는 시선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있었다.
“세이시로 씨.”
나루세는 눈에 가득 들어차는 그 얼굴을,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를, 걱정이 묻어나는 눈동자를, 조심스레 제게 닿고 있는 손길을 사랑했다. 분명, 사랑했었다. 퍼뜩 지금은? 이란 물음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머릿속은 희뿌연 안개가 드리운 듯 걷어내려 해도 전혀 걷어지질 않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저를 보는 연인의 얼굴을 다시금 천천히 뜯어보았다. 퀭한 눈, 푸석한 피부, 더 마른 것 같은 얼굴. 얼굴 가득히 피곤함을 담고 있었다.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다. 제 눈가를 매만져 주려는 듯 뻗는 그의 손을 저지했다.
“우리, 그만… 헤어질까요?”
나루세가 저지한 대로, 가만히 멈춰서 그 이야기를 듣는 토카이의 눈동자가 일순 일렁였다. 이내 평온해진 눈동자에 울며 헤어지자 말하는 제 연인을 담았다. 어쩌면 이 모습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료. 헤어지고 싶어?”
화를 낼 거라, 혹은 슬퍼할 거라 생각했던 그의 눈은 담담했다. 나루세는 순간 일상적인 말을 내뱉었나, 하고 제가 뱉은 말을 되짚어보았다. 공중에 멈춰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한 손은 애꿎은 소파의 겉면을 꾹 쥐었다. 나루세는 입을 다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묻는 눈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기에.
“…아프면, 어리광이 는다 더니. 료도 그런가보네.”
소아과 담당에게서 흘려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는 말. 진심도 아닌 말을 내뱉은 나루세가 그러한 경우일 것이라고. 흐트러진 머리를 주저하던 손으로 정리해준 토카이가 입을 꾹 닫았다. 그러한 경우가 아닐 경우, 나는 너를 잡을 자격이나 될까 싶었다. 몇 번을 자문해도 돌아오는 답은 부정적이었다.
“어리광 아니에요.”
“…그럼?”
“오롯하게, 진심,”
“진심이라면 울면서 이야기하면 안됐어, 료.”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어느새 줄기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받친 소파 팔걸이를 다 적실 기세였다. 벌어진 토카이의 입술 새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여전히 축축한 나루세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닦아냈다. 열이 올라 물러진 눈가에 닿는 손길이 따끔했다.
“울어도 돼. 그동안 울고 싶어도 울지도 못했을 만큼 바빴을 텐데. 실컷 울고, 이야기하자 우리.”
*
한참을 울었다. 처음 눈물을 쏟아내 본 것처럼, 온 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라 울었다. 서럽게 우는 그를 가만히 보며 토카이는 가만 머리를 토닥였다. 한참이 지나 엉엉 울던 것이 훌쩍임으로 바뀌고 그 훌쩍임마저 멎어 들 쯤 토카이가 입을 열었다.
“머리 아프겠네. 물 마셔.”
컵을 건네곤 나루세가 이야기를 시작 할 때까지 기다렸다. 컵 하나를 다 비우고서야 나루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헤어지자고 한 거, 진심 아녜요.”
“응.”
“그냥, …모르겠어요. 나, 난 바빴고, 아팠고…,”
“그랬지. 과로와 감기가 겹쳤던 거니까.”
“당신은, 안본 사이에 너무 야위었고…, 일이 너무 바빴겠죠. 바쁜 당신에게 나란 짐까지 지워주고 싶지 않았어요.”
마른 눈가에 다시금 눈물을 글썽였다. 토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그랬구나. 라는 말만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물기가 남은 나루세의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어요.”
고개를 숙인 나루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제가 한 말을 다시금 내뱉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료.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건가?”
입 밖으로 꺼내면서도 서글픈 느낌이 드는 말인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눈도 못 맞추고 하는 말이 가슴을 따끔거리게 했다. 나루세는 제 볼에 닿은 손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아뇨. 그럴 리가요. 사랑해요.”
손을 부여잡는 것보다 더 다급하게 말한 나루세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토카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 손을 부여잡은 나루세의 손을 돌려 잡았다. 손 가득 잡은 나루세의 손이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 손에 잡힌 나루세의 손가락을 매만진 토카이가 손등에 잘게 입을 맞췄다.
“그건, 나도야. 아직 널 사랑해.”
대답하려던 나루세가 입을 다물었다. 가라앉았던 열이 다시 오르는지 나루세의 목소리가 잠겼다.
“네 마음이 식은 게 아니라면 헤어지자고, 하지 마.”
꽤, 단단한 목소리로 말한 토카이가 여전히 나루세의 손등에 입을 맞춘 채 눈을 들어올렸다. 마주친 눈은, 형용하지 못할 감정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번뜩이며 빛나는 눈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 토카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 내가 하면 웃길지 몰라도.”
“….”
“건강 챙겨가면서 해, 뭐든.”
픽, 웃은 토카이가 말을 덧붙였다.
“아마, 메시지 못 읽은 것 같은데.”
“메시지요?”
“…못 봤네. 뭐, 나중에 확인하겠지만. 메시지에 한 말 진심이야. 그리고 덧붙여서,”
나루세의 눈이 엎어 놓은 제 휴대폰을 흘끔 쳐다보았다. 나루세의 볼을 잡고 제 얼굴을 보게 만든 토카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바쁜 건, 어쩔 수 없지. 유능하니까. 그리고 난, 유능한 사람 좋아해.”
“….”
“물론, 유능한 애인이 좋은 것도 있지. 그리고 나도, 그에 못지않게 바쁘니까.”
토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말로 하는 것이 다르면서 같았다. 조금만, 정리해서 말하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다듬어진 말, 정갈한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메시지에 적은 말이 너무나도 적당한 말이라서, 그 보다 더 딱 맞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거 다 떠나서. 우리 너무 바쁜…, 근면한 삶을 살았지.”
나루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는. 그 근면함 따위 던져도 되지 않을까.”
“…세이시로 씨.”
“던진다기 보단, 근면했던 우리에게 서로라는 상을 주자.”
나루세와 마주친 눈을 살짝 접어 웃었다.
“너무 오랜만인 애인을 지금 유혹하는 거야.”
그 말에 나루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다정한 말을 건네는 그가 정말 제 연인이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미간과 콧잔등을 찡그리며 머뭇댄 토카이의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같잖지만, 넘어와 줄래? 네가 너무, 부족해.”
결국 나루세는 웃음을 터트렸다. 기꺼이. 토카이의 손을 꾹 잡은 나루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