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
웅앵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이 장작을 집어삼키며 타올랐다. 겨울의 냉기가 스며드는 방 안에 서서히 온기가 퍼져들었다.
새하얀 피부 위에 주름이 진 여인이 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앉아, 읽고있던 편지를 곱게 접어 난롯불 속으로 던져버렸다. 얇은 편지지는 순식간에 불에 타 재가 되어버렸다.
“정말 하나같이 다 맘에 안드는 일 뿐이구나.”
여인은 편지의 답장용으로 새 편지지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서랍 안에 들어있던 깃펜을 집어든 여인은 펜촉을 잉크에 적시고 편지지에 글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줄을 써갈기던 즈음 여인이 편지를 쓰는 것을 멈추고 문가에 번듯하게 선 남자를 흘겨보았다.
오노 사토시라는 이름의 집사.
근래에 몇십년간 니노미야 가에서 일하던 집사가 부상으로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임시로 데려온 이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내 아들이 혼담이 오가던 상대에게 모욕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얘기. ”
오노는 여인이 제게 이런걸 묻는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은 집사로써 정식으로 채용된 것이 아니라 그 공석을 메꾸기 위해 데려온 이에 불과했으므로 굳이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녀답지 않았다.
물론 가문의 사적인, 혼담같은 얘기를 스쳐지나가는 이에게까지 내뱉을만큼 니노미야 가의 안주인이 허술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듯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카즈나리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쯤이야 나도 알고 있었으니 묻는거라네.”
“....알고 계셨습니까.”
“그간 저택에서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그 정도를 모를정도로 내가 무지하지는 않았지.”
“죄송합니다. 그렇게까지 절 마음에 두시는건 아니라 여겨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됐네. 사람의 감정같은거야 눈에 보이는걸로 판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 제 입으로 내뱉는 것도 우스운 꼴 아닌가.”
오노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인은 편지 쓰던 것을 마무리 하고 봉투에 넣었다.
봉투 위에 뜨거운 밀랍을 붓고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도장을 꾹 찍어눌렀다. 여인은 봉투 끄트머리에 향수를 한번 옅게 뿌리고는 멍하니 이를 바라보던 오노에게 내밀었다.
“자. 이번 건에 대한 사과의 뜻이라고 하며 잘 숙성된 화이트 와인 한 병과 함께 전해주도록 해.”
“.....예.”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맴도는 편지지를 받아든 오노가 웃옷 안주머니에 구겨지지 않게 조심히 집어넣었다.
고요한 복도에 마룻바닥 위를 걷는 구둣소리가 울려퍼진다. 오노는 복도의 창문마다 달린 커튼을 열어젖히며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아침 햇살이 복도에 스며들고, 꽃병에 꽂힌 꽃들이 생기있게 살랑거렸다. 오노는 복도 맨 끝자락에 위치한 방문 앞에 멈추어 서서 문을 두드렸다.
“도련님. 오노입니다.”
나긋한 한 마디에 방문이 열어젖혀졌다.
오노는 저를 신나는 얼굴로 바라보는 아이를 바라보며 살풋 미소지었다.
“왜 이렇게 늦게왔어?”
“마님께서 부르셨거든요.”
“....보나마나 내가 저번에 그 여자애 쫓아낸 일 때문이지?”
그건 걔가 너한테 차를 들이부었으니까 그런거였는데. 니노미야가 항의를 하듯 불만스럽게 토로했다. 오노는 손목을 잡아 이끄는 손길에 따르며 토닥여주었다.
“마님께서도 조만간 알아주실거에요.”
“그런건 상관없어. 사토시만 있으면 되니까.”
니노미야가 오노를 품에 끌어안았다. 작은 체구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오노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처럼 꼭, 니노미야는 자신의 어머니 대신 늘 오노를 찾았다. 그래서인지 안주인은 일찍 죽은 남편대신 가주로써 살면서 아들이 아닌 일을 선택한 대가라고 자책하곤 했다.
“이거 뭐야?”
“아...마님께서 전달하고 오라하신 서신입니다.”
“그 여자애 집에 보내는거 맞지?”
“잠깐, 도련님!”
니노미야는 오노의 옷 안쪽에 들어있던 두툼한 편지봉투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옷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들고 난로 안으로 던져버렸다.
오노가 막을 새도 없이 편지지가 불에 타버리는건 순식간이었다.
오노는 허망하게 이를 바라보며, 안주인께 뭐라 변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졌다.
“이런거 안보내도 돼. 보내봤자 걔랑 난 결혼 안할텐데 뭐.”
“억지 부리셔도 혼약은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억지 부리는걸로 보여?”
니노미야가 서늘한 시선으로 오노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자신을 마냥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점점 멀리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의 명령 하나로 자신에게 반항을 하는 것 같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쾌감에 니노미야가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당겨 침대에 눕혔다.
“그 집안, 최근들어 가주가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단 소문이 돌거든. 어머니가 그 가문의 딸과 날 결혼시키려던건 가주로써의 입지를 다지는데 도움받기 위해서였을 뿐이니 이제 혼약이 깨지는건 순식간이겠지.”
“그걸 다 예상하고 그 아가씨께 그리 행동하셨던 겁니까?”
니노미야가 오노의 셔츠를 끌어 내리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보였나봐?
“그런 점이 없진 않았지만, 너한테 막 대하는데 내가 좋게 봐줄 리가 없잖아.”
“한낱 시종에게 귀족이 차를 부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넌 한낱 시종이 아니고 말야.”
목덜미를 빨아들이는 입술에 오노가 옅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새하얀 피부가 발긋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절경이었다. 니노미야가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오노에게 입을 맞췄다.
다정함이 그 모든 행위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있었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눈치채지 못하는게 이상할 만큼. 오노가 자신의 바지를 끌어내리기 쉽도록 허리를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도련님은 언제나 상냥하시네요.”
“아무한테나 그러지는 않아.”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낭창한 허리를 감싸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탐닉하는 것처럼 자신의 안을 빨아들이고 욕정을 들이붓는다. 그리고는 오노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같은 목소릴 내며 오노를 끌어안은 니노미야는 그와 몸을 겹쳤다.
하지만 오노는 단 한번도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니노미야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무척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마냥.
※
“휴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니노미야가 서류에 가문의 인장을 쿡 내리찍었다. 진즉에 그 인간을 처리했어야 했는데. 자꾸만 오노와 자신을 떼어놓을 듯이 일이 돌아간다. 괘념치 말고 다녀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을 알고, 이미 휴가 신청서를 제출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입장을 묻기에는 겉부터 너무나 태연자약해서 물을 가치도 없어보였다.
“수도로 직접 모시는 쪽은?”
“병세가 많이 악화되시는 것을 우려해 지방에서 요양 중이십니다만.”
“좋은 의원을 불러줄테니 가만 있어도 되지 않나.”
“이미 의원들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해서요.”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다. 또 무슨 꿍꿍이지. 인상을 찌푸리고 별 갖가지 수단을 들어봤으나 결국 한 시간 동안 실랑이 한 끝에 패배한 쪽은 니노미야였다.
“딱 이틀간만이랬지.”
“임시라곤 해도, 집사이니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요.”
“....이번만이야.”
“후후. 도련님은 정말 상냥하세요.”
오노가 니노미야를 끌어안고 볼에 입술을 맞췄다.
...그거 아무한테나 그러는거 아니라니까. 니노미야가 빨갛게 물든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이틀을 못 참을 만큼 도련님이 인내심이 부족하진 않으신 분 아니냐고 오노가 띄워주는 바람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뒤늦게 나 그렇게 참을성 많지 않다고 유치하게라도 굴까 싶었지만. 돌아오면 뭐든 소원을 하나 들어드리겠다고 약조를 받아버렸으니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틀 동안 무슨 소원을 빌까 고민이나 하고 있으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거라고 애써 위안을 하며 니노미야는 오노가 저택 밖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래 뭐, 고작 이틀 정도야.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못 버틸 리가 있겠어? 가볍게 마음을 잡고 다시 밀린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니노미야도 자신의 인내심이 메마른 우물 바닥마냥 바짝 말라버릴 것이라고는, 정말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냥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
“꺄악!”
벽 너머에서 들린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에 시녀 하나가 몸을 움츠렸다. 입시로 왔던 집사, 오노가 요즈음 자리를 비우면서 저택 안의 분위기는 귀신의 집 뺨치는 수준이었다.
숨소리 하나 내는 것에도 모두가 예민하게 굴었으며 마룻바닥을 걸어다니며 삐걱이는 소리 하나라도 냈다 하는 날에는 어디서 가문의 도련님이 등장할지 몰라 바짝 긴장하는 것이 태반이었다. 하녀 몇이 복도에서 재잘거렸다는 이유로 꽃병이 날아왔다는 소문도 들릴 정도였다. 그 누구하나 마음 편히 일을 하지 못하자 니노미야 카즈코는 속썩이는 아들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
시종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두었기 때문에 저택 밖으로 말이 새어나가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는 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문 열렴, 카즈나리.”
그러자 대답 대신 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대 열 생각이 없다 이거지. 카즈코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아들을 후려치고 교육을 하는 것 대신 늘 그랬듯이 문 밖에 서서 입을 열었다.
“일개 집사가 휴가를 갔다는 이유로 이렇게 폭력적으로 시종들을 대하다니,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수준낮은 사람이 되었지?”
“신경 끄고 일이나 하러 가시죠.”
원래부터 그랬잖아. 수준낮은 아들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날이 잔뜩 곤두선 목소리었다. 아들이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답지 않음에 카즈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꼬여버린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신보다 만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집사에게 마음을 여는 아들은 몇 번이고 대화를 시도해도 어려웠다. 무엇을 하든 아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니노미야는 방 안에서 끝까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으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느순간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시점이 오자 그가 몸에 주었던 힘을 풀고 바닥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오노는 이런 때마다 자신을 보드라운 향기와 함께 감싸 안아주었는데. 그의 품이 그리웠다.
‘빨리 돌아온다고 약속 했으면서.’
약속한 시간보다 더 늦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다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를 손에서 함부로 놓는 것이 아니었다.
‘도련님께선 언제나 상냥하시네요.’
모두에게 상냥한 것이 아니다.
니노미야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 잘 알았다.
오노에게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를 손 안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던 것은 권력만으로 오노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음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이 귀이 여기는 이에게는 언제나 친절을 베풀어야 상대가 기쁨을 느낀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참을 수 있었다. 오노가 기뻐한다면 그걸로 좋았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작은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는 때가 찾아왔고 소유욕은 오노를 완전히 집어삼킬 것처럼 지독하게 짙어졌다.
손에서 놓고 싶지 않게 되었다.
니노미야가 힘 없이 침대에 몸을 뉘였다. 며칠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네가 있어야 잠이 들텐데.’
고통 속에서 눈을 감으니, 희미하게 오노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도련님. 못 주무실 것 같을 때에는 절 부르세요.’
그럼 제가 도련님이 잠들 수 있도록 안아줄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그는 오지 않았다. 약속했던 것들이 신기루처럼 흐렸다. 네가 보고싶어. 메말라서 갈라진 목소리로 니노미야가 희미하게 내뱉었다.
따스한 품을 잃은 침상이 새벽의 공기처럼 시렸다.
※
“...집사님!”
“세상에, 집사님. 정말 보고싶었어요!”
거의 죽다 살아나온 사람을 마주 본것처럼 사용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감격했다. 무척 달가운 듯 마굿간에서 뛰어나오는 이도 있었다. 오노는 싱그럽게 웃으며 그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인사했다.
“그동안 잘 계셨나요?”
“말도 마세요. 집사님 없으시다고 저택 분위기가 이렇게 흉흉할줄은 몰랐죠.”
“앞으로 평생 여기에서만 눌러앉아 있어주시면 안될까요.”
“되도록 노력해보죠.”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사용인들과 오노 사이의 기류가 부드럽게 흘러갔다. 오랫동안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회중시계를 살짝 확인해본 오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마님을 뵙기로 했는데. 저 먼저 가볼게요, 여러분.”
“네, 나중에 봬요!”
저만치로 사라지는 오노의 뒷모습을 보는 이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어쩜, 우리 집사님은 저리 친절하기도 하실까.”
“당사자는 매일같이 도련님은 친절하시다 노래를 부르는데 거울 좀 보고 살라고 해야겠어. 하하.”
“아무튼 집사님이 돌아오셨으니 다시 저택이 조용해지겠네요.”
한시름 놓은 시종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저마다 맡은 구역으로 되돌아갔다. 평화를 찾은 저택에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도련님.”
나긋나긋한 목소리. 조곤조곤한 말투.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니노미야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그구나.
“....늦었잖아.”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마부가 사고를 내서-”
“조용히 해.”
새 마차를 찾느라 늦었다는 변명은, 지금 말해봤자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니노미야는 오노를 끌어안고 그 향을 깊게 들이켰다. 불안감에 몸서리치던 감각이 사라지고 편안함이 찾아왔다.
몸을 어루만지고 쓸어내리는 손길이 은근해서 오노가 살짝 밀어내려 했지만 니노미야의 강한 악력에 꿈쩍도 않았다. 그리고 몇분을 말없이 끌어안고 있자니 문득 니노미야가 입을 열었다.
“...널 보내고 엄청 후회했어.”
“그러셨습니까.”
목소리 만으로 얼마나 후회했을지 절로 느껴진다.
바짝 메마른 목이 갈라졌을 정도라니. 자신을 절대 놓지 않으려고 옷깃을 꾹 붙드는 것이 조금 귀엽기는 했지만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 굳이 티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어머니께 가야하는 것만 아니면 이 쓸모없는 옷들을 벗겨버릴텐데. 너한테는 알몸이 제일 잘어울리거든.”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아닌거 알면서.”
니노미야가 공허한 눈으로 오노의 몸을 감싼 검은 정장을 흘겨봤다.
침대 위에선 그렇게 신음소릴 흘려대는 주제에 평소엔 주름 하나 지지않은 단정한 옷차림이라니.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다. 야살스럽기 그지없는 눈웃음하며 그동안 이것들을 어떻게 보지않고 버텼는지 스스로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 도련님. 마님을 뵈러 가야 합니다만.”
“알아.”
“그럼 그만 놔주시죠.”
지금 못 놓는거 알면서 꼭 그런다. 진짜 오노는 사람 애간장 태우는데에는 재주가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홀리는게 여우너구리같아. 어디 숨겨놓은 꼬리가 달려있지는 않은지 엉덩이 쪽을 슬쩍 보자 오노가 니노미야의 어깨에 양 팔을 걸쳤다. 어디 이래도 안 놓나 보자는 심보같았다.
하반신이 더 바짝 붙어오자 니노미야가 참기 힘든 듯 끄응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오노는 마냥 즐겁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참. 휴가를 다녀오면 상을 드리기로 했었죠.”
“그랬지.”
“생각해 두신거라도 있나요?”
그러자 준비해둔 것처럼 니노미야가 씨익 웃었다. 평소 중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서랍의 잠금쇠를 풀고는 낯익은 물건 하나를 꺼내들었다.
검은색 가죽으로 된 개 목걸이었다. 고리 끝에서 은색 고리가 달랑거렸다.
“네가 내 소유라는 증표야.”
“이건 인간이 사용하는 물건이 아닙니다만.”
“그렇지.”
니노미야가 손으로 목걸이를 들고 흔들었다. 하지만 넌 발정난 개잖아. 그렇지?
외설적이다 못해 일반 귀족들이 들었다면 천박하다 했을 발언이었다. 하지만 오노는 마주 웃어보였다. 자신의 도련님을,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면서.
오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고 혀를 내밀어 목걸이를 핥고는 물어서 들어올렸다.
“그럼 직접 걸어주세요. 개는 주인이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어야지요.”
누가보아도, 제가 도련님의 것이란걸 알 수 있도록.
그러고는 눈꼬리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도록 웃는다. 니노미야의 눈동자에 욕망이 번들거렸다. 정말 한 치의 예상도 들어맞질 않는 사람이었다.
오노의 얄쌍한 목에 목걸이를 두르고 니노미야가 체인을 단단히 걸었다. 목걸이에 달린 은패에 새겨진 니노미야 가의 인장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됐어. 이제 가도 좋아.”
“이거 하나로 기분이 풀리시다니. 굳이 소원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이런 것쯤이야 해드렸을텐데요.”
“그럼 철회해도 돼?”
“이미 늦어버려서요.”
떠난 마차 붙잡지 마세요. 단호한 말에 니노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흐트러진 옷을 갈무리하고 오노가 방을 나설 채비를 했다. 오자마자 바로 보내주려니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니노미야가 오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금방 와야 해.”
“물론이죠.”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대답한 오노는 문을 열었다. 툴툴거리며 의자에 기대어 있는 니노미야를 보고는 그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섰다.
※
“자, 잠깐....! 당신들 뭐야?! 뭐냐고!”
마부가 자신을 우악스럽게 붙드는 이들의 손을 뿌리치며 바락바락 소리질렀다. 그로써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마부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뿐인데. 그러나 그의 외침이 무색하게 사람들이 마부의 손목에 밧줄을 묶었다.
시녀장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마부를 끌고 간 곳은 저택 뒤 편에 딸린 작은 창고였다.
먼지투성이 창고 안에 내팽개쳐진 마부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다, 당신들 미친거 아니야!? 갑자기 이게 무슨....!”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요.”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꿰뚫고 이성을 집어삼킬 것처럼 뚜렷하게 들려왔다.
마부는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무척이나 익숙한 미성의 목소리에 몸이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어둑한 창고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구둣소리가 크게 울렸다.
“온몸이 먼지투성이라니. 당신에게 걸맞는 꼴이군요.”
“하, 하하...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더럽고 추잡한 마녀같으니라고! 네가 도련님을 꾀어냈다 해도 이런 짓을 보고 가만 있으실 것 같으냐?”
“저런. 아직도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한걸까.”
오노가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다 마부의 앞에 은색 편지지와 금화 몇 개를 던졌다. 편지지에는 니노미야 가문의 집사님께라고 적혀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마자 마부가 충격을 먹은 얼굴로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빛을 등진 오노의 눈에는 온기가 없었다.
“당신이 그토록 경외하던 아가씨께서는,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시종 하나쯤은 태연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랍니다.”
“웃기지마.... 우리 아가씨는 그럴 분이 아니야.”
마부가 이를 뿌득 갈았다. 마음 속 한켠에서는 저 편지지에 찍힌 가문의 인장이 거짓된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려 12년간 모신 가문의 아가씨가, 자신을 이토록 허망하고 쉽게 내칠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였다.
그저 아가씨가 명령한 대로 눈 앞에 서 있는 이 추악한 마녀를 없애면 모든게 해결될 거라고, 마부는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켰다.
‘나에게 수치를 준 그 집사가, 다시는 이 세상에서 눈 뜰 수 없도록 하세요.’
그래, 자신의 아가씨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그 임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한 주제에 주인을 의심해서는 안되었다. 충성을 바친 종을 버리다니, 그럴리 없었다. 머잖아 나를 구하러 오실 것이다. 마부는 필사적으로 그 사실만을 붙들었다.
그러나 오노의 목소리가 희망을 박살내듯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만약 당신이 끝까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 아가씨의 가문은 제 편을 들어줄거라고 약조도 하셨더군요.”
“....거짓말.”
“뭣하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네 놈이 또 뭔가 술수를 부린거지!?”
“저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했다면 그건 당신 쪽이겠죠. 절 죽이려 했으니까요.”
오노는 바닥에 떨어진 편지지를 집어들었다.사고를 낸 경위에 대해 마부를 추궁하였다 하니 그 즉시 도착한 답변이었다.
자신의 가문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연관이 없으며, 감히 귀족의 것에 손을 대려한 어리석은 마부에 대해서는 가문의 위신을 걸고 니노미야 가문의 편을 들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이었다. 우습게만 보였다. 오노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편지를 구둣발로 짓이겼다.
어떻게든 자신을 없애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더니, 정작 더러운 술수를 쓴 덜미가 잡히려니 바로 꼬리를 끊고 도망쳤다.
한편의 희극이나 다를게 없었다.
‘바로 명예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가만두는 편이 좋겠지.’
얼마전에 니노미야가 한 말대로라면, 어차피 가주가 곧 죽으면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될테니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다. 알아서 죽으라지. 눈앞의 잔챙이만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도련님. 도련님을 뵙게 해줘.”
“.....뭐?”
갑작스레 마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정말로 예상 외의 것이었다.
순간 표정 관리가 안되어 오노의 표정이 흐트러진 것을 보고 마부가 옳타구나 하고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애걸복걸하며 바닥을 기었다.
“도련님은 아실거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걸! 저 천박한 잡것이 총애를 받는다고 도련님의 이름을 가지고 방종하게 굴었다는걸 알면....!”
“당신의 무지엔 동정마저 하게 되네요.”
모든 동아줄을 잘라버렸더니, 썩은 줄이라도 붙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오노는 처음으로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마부는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하니 제가 도련님이 모르시게 일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 그럼....다 아신다고? 모든걸?”
“전 주인 몰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취미는 없어서요.”
아마 지금쯤, 시녀장의 입을 통해 현재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있겠지.
본인이 직접 나서서 마부를 처벌해도 되지만, 그는 그러지 않고 자신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자신의 개는 뭘 해도 상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전부터 그는 자신의 어머니 대신으로 생각하는 모양인지 뭘 하든 선택권을 전부 자신에게 주는 버릇이 있기도 했지만.
아무튼 마부의 목을 자르는 통째로 삶든 그건 오노의 자유라는 소리였다.
“사실 당신에 대한건 이전부터 알았어요. 세작이 사용인 중에 숨어있는 일은 잦았고.”
“그, 그렇단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냐? 하지만 왜? 다 알고 있었는데도 날 왜 내버려둔거지?”
“재밌으니까요.”
체스판 위에서 말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었거든요. 마부의 눈빛에 절망이 서렸다. 사실 그 말고도 세작은 많이 숨어있었지만 쳐내지 않았다.
그들이 뭘 하든 선을 넘지만 않으면 가지고 이용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마부가 오노를 죽이려 한 그 순간 모든게 끝이 났다.
“제가 총애를 받은건 사실이지만, 방종하게 행동하는걸 두고도 도련님께 굳이 알리지 않는 친절을 베푼 쪽은 저였어요.”
그걸 알지 못하고 일을 벌리고 다닌 것은, 온전히 마부 그의 책임이었다.
“세작을 알고도 모른체 하다니... 하, 도련님이 이 사실을 눈감아 주실거라 자신하는 모양이지?”
“물론이에요.”
오노가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게 웃었다.
왜냐하면, 그는 날 사랑하니까.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는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 목에 걸린 개목걸이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온전히 사랑해 줄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했다.
사람은 감정이 쉽게 바뀌는 동물이라 하더라도 오노는 니노미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리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이 행동 역시, 그 자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럼, 즐거웠어요.”
오노의 지시에 따라 시종들이 만신창이가 된 마부를 들쳐메고 창고 밖으로 사라졌다.
텅 빈 창고 안에서, 오노는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여전히 오만하고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