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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케이스

※ 이 작품은 2011년 10월 22일 방영된 아라시니시야가레 미타니 코기 편의 정극

‘갈림길’에서의 니노미야의 캐릭터를 필모 삼아 만든 작품입니다.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잠시 나루세 료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그를 처음 봤을 땐… 그래, 아주 평범한 저녁이었을 것이다.

  니노미야는 가끔 집 근처에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에 들르곤 한다. 후줄근한 운동복을 입은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편의점에 도착하면, 작은 푼돈으로 그 편의점에서 가장 싼 캔맥주를 사든다. 마땅한 돈이 없어 안주는 따로 살 수 없지만 늦은 밤 찬 바람을 맞으며 맥주의 경쾌한 소리를 듣는 것이 삶의 낙이라면 낙이었다. 그는 안락함이라곤 쥐뿔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나서 방금 깐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척하는 씁쓸한 맥주의 목 넘김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런대로 참고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내려놓은 캔맥주를 만지작대던 니노미야에게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니노미야가 있는 편의점의 맞은편, 그리고 옆으로 두 건물쯤 지나고 나면 우체국이 하나 있다. 그 우체국에 말끔히 정돈된 머리와 단정한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들어가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니노미야에게 그 남자에게 왜 눈길이 갔냐 물었다면, 니노미야는 아마 제 친구와 비슷한 차림이라서, 라고 대답할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몫은 네가 힘내는 거야.’

  며칠 동안 니노미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 말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매연이 올라오듯 속이 말라왔고 알 수 없는 갈증이 솟구쳐 또다시 캔맥주로 손이 가게 되었다.

   ‘친구를 부하 다루듯 대하는 주제에.’

  부하에게나 하는 짓을 버릇처럼 친구에게 하는 건 거만을 넘어 자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가 분명했다. 마츠모토가 좋은 친구였기에 망정이었다. 다른 사람한텐 잘도 이런 태도로 대해왔겠지, 하며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가까스로 풀어냈다.

  그때, 고개를 슬쩍 들던 니노미야가 우체국에서 나오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인 그의 배지가 눈에 들어오자 니노미야는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변호사인가….’

  변호사, 니노미야의 인생과는 동떨어져 있는 직업.

  대충 봐도 고가로 보이는 정장과 구두가 니노미야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같은 하늘 아래 있어도, 같은 거리를 걷고 있어도 그와 니노미야는 분명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지만 삶의 질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니노미야는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애꿎은 맥주캔만 쥐어짜 냈다.

  그런데 어쩐지 저 변호사는 자신을 계속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니노미야였다. 거리가 그다지 가깝진 않아 그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그의 고개는 분명 니노미야 쪽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다 방금은 눈이 마주쳤었고’

  니노미야는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심해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만이 점점 머릿속에 가득 차올라 무어라 한마디라도 하려 입을 뗐을 때였다. 그 변호사는 고개를 획 돌려 그대로 니노미야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싱겁기는’

  니노미야는 미지근해진 캔맥주를 비워냈다.

 

 

 

 

 

  그랬을 터였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난 왜 그 남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일까.

   “음, 이번 맥주는 전보다 괜찮은 것 같네요.”

   “이러다 편의점에 있는 캔맥주는 다 마셔보겠어.”

  행인이 이 광경을 본다면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운동복 차림에 머리밴드나 차고 있는 녀석이 깔끔하고 번듯한 변호사와 술을 마시고 있다니, 그것도 편의점 앞에서.

  그것을 자각한 순간 난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와의 술자리를 즐기고 있다는 나 자신이 우스워서. 이 남자의 얼굴과 행동에 시선을 두는 나 자신이 어이없어서. 내 주제는 내가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내 웃음에 나루세는 딱히 어떤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나의 다음 행동을 궁금해할 뿐이었다. 그리고 난 그의 궁금증을 없애줄 만한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왜 나랑 술을 마시는 건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편의점 캔맥주가 그렇게 맛있나 하고,”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이유”

  이 변호사 양반과 술을 마신 적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대략 3주 전부터,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 새로운 캔맥주와 함께 이런저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딱히 약속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편의점에 간 날이면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는 바람에 반강제로 이루어진다. 우연이라기엔 많은 횟수이긴 하지만 말이다.

   “혹시 동정이야? 불쌍해 보이는 백수한테 말이나 좀 걸어주자 싶은,”

   “그건 절대 아닙니다”

  내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박아줄 텐데 싶은 내 안의 삐뚤어진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럴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내 눈치와 직감에서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내게 답했다. 난 어딘가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난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나루세와 면식이 있는 것 같은 한 남자가 다가와 대화의 흐름을 끊어냈다.

   “나루세 변호사님 맞으시죠? 저 저번에 그…”
   “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변호사님 덕분에요”

  훈훈한 대화가 오가고 있는 지금, 난 어떤 텔레비전 속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방송인과 시청자, 딱 그뿐.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저 남자가 이 자리를 떠날 때 날 흘겨보고 간 것조차 기분이 나빠지진 않았다. 다만, 내가 지금 언짢은 이유는 하나.

   “하던 얘기를 계속할까요. 어쨌든 전,”

   “당신 거짓말 잘하네”

  난 일부러 언짢다는 기운을 표출했다. 필요성 없는 거짓말은 그 사람의 버릇에서 비롯된다.

   “당신 저 사람 모르잖아”

   “압니다, 제 지난 의뢰인…”

   “이름은? 직업은? 하다못해 의뢰받은 사건은 기억하고 있어?”

  그는 심하게 동요하며 입을 다물었다. 지어내려 한다면 할 수 있었겠지만 내 표정을 읽으려 한 탓에 때는 이미 늦었었고, 잡아떼며 부정하기엔 내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을 것이다.

  몇 초의 정적 끝에, 그는 잔뜩 힘준 허리를 풀어냈다. 무언가를 버린듯한 느낌으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나에게 말했다.

   “버릇인가 봅니다, 이런 거짓말이.”

  씁쓸하게 지어내는 웃음이 순간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를 향한 내 인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항상 잔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이 없는 나와 달리 그는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삐뚤어진 말을 해도 그저 그런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고요한 바다 같은 사람, 그게 변호사인 나루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처음으로 내가 틀렸다고 깨달았다. 이 세상엔 고요한 바다라는 게 존재할 리 없을 터인데. 어느 한쪽에선 분명 파도가 치고 있을 터인데.

 

 

 

 

 

   “제가 위선이라면 당신은 오만이에요”

   “그 말은 맞아”

  니노미야는 빈 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리고 약간 내려온 머리밴드를 고쳐 쓰며 나루세에게 물었다.

   “있잖아, 거짓된 겸손이 있는 사람과 겸손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은 거 같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둘 다 술기운이 차올랐기 때문인지 대화 맥락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나루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치 제 앞에 있는 니노미야와 자신을 두고 겨루는 것 같아서. 그리고 실제로도 그것을 노리고 묻는 말일께 분명했다. 그도 마찬가지도 깔끔하게 비워낸 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역시… 겸손한 사람이네요.”

   “응? 아하하! 맞네-”

  뜻밖의 답에 니노미야는 당황하고 말았지만, 곧 인정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해도 진실한 사람이 훨씬 더 나으니까. 이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같은 종류의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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